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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 청년과 웨일즈 골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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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즈에서는 연일 계속되는 비 때문에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비를 핑계 삼아 그간의 피로라도 풀자는 심산으로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의 성 근처 Guest house에 짐을 풀고 3일을 내리 쉬었다. 그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가끔 인터넷 하고… 다행인 것은 잉글랜드에 비해 숙박료가 싸고 음식이 맛있다는 것이다. 여행의 첫 출발지가살인 물가로 악명 높은 런던이었으니 웬만한 곳에서는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도심이나 유명 관광지가 아닌 이상 영국에서 호텔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특히나 골프장 위주로 움직이는 우리의 행로는 도심이나 유명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정식 민박 개념인 Bed & Breakfast(B&B)나 기업형 민박인 Guest House에 투숙하게 되었다. 비록 하늘도 우중충하고 비도 자주 뿌리지만 영국의 7, 8월도 엄연히 휴가철인지라 주말이 되면 이 몇 안 되는 숙소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었다.

카디프에서 우리가 숙소로 잡은 Guest house 이름은 Church Town, 처음엔 뭔가 종교적 색채의 커뮤니티형 숙소가 아닌가 싶어 그냥 지나쳤었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 카디프 성으로 모여든 관광객들 때문인지 근처의 모든 숙소가 No Vacancies였다.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 문을 두드린 Church Town은 알고 보니 그 ‘Church’가 아니라 카디프가 낳은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샬롯 처치(Challotte Church)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샬롯 처치의 부모가 운영하고 있다는 것.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다이닝 룸에 거의 도배가 되어 있었다.


샬롯 처치를 모른다면, 지난해 <브리튼즈 갓 탤런트>라는 영국의 TV 프로그램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라 이미 한국까지 다녀간 6살 코니 탤벗은 아실런지. 사람들은 코니 탤벗을 제2의 샬롯 처치라 부른다. 그 데뷔 과정이 흡사했기 때문이다. 샬롯 처치는 여덟 살 때 'Richard and Judy Show'라는 노래자랑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었을 만큼 당돌했던 모양이다. 결국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고 곧바로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고. 그리고 몇 달 후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본 소니 뮤직 UK 책임자에게 발탁되어 즉석에서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니 대단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 데뷔 앨범은 영국 클래식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는가 하면 팝 차트에서도 5위권에 드는, 말 그대로 크로스오버 히트를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보컬리스트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잘 생긴 게스트 하우스의 매니저 총각이 우리를 방으로 안내해 주면서 대뜸

“골프 치세요?”라고 물어왔다.

“어떻게 알았어요?”

“입고 있는 옷이 골프웨어 잖아요. 신발도… 게다가 등에 Beanpole Golf라고 크게 써 있고요. 근데 왜 Beanpole이에요?”

“그냥 상표 이름이에요.”

“난 또… Beanpole이 원래 키 크고 마른 사람을 뜻하는데 보아하니 키도 작은데 무슨 키다리 골프 클럽 회원인가 했어요. 그 Beanpole이 아니군요. 하하하”

“뭐 저도 이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여기 가면 밤새 기도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들어왔어요. Church가 그 Church가 아니었군요. 하하하”

이렇게 말을 튼 총각과의 농담은 3일 내내 이어졌다.

샬롯 처치가 카디프로 올 때마다 늘 자기가 차려준 아침을 먹는다고 자랑하던 게스트 하우스 매니저 총각, 너무 농담을 잘 해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 곳에 머물렀던 3일간 그를 통해 웨일즈와 웨일즈 골프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2살 컴퓨터공학과 출신이라는 그는 아르바이트로 현재의 매니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게스트 하우스 손님들을 건사해야 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9홀 골프를 꾸준히 즐기고 있는 골프 마니아였다. 한국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았다. 동생이 일본에 유학 가 있는데 한국에서도 1년 정도 연수를 했다며 월드컵 이야기, 삼성 노트북 이야기를 꺼내더니 한국의 골프 이야기를 꺼냈다.

듣고 보니 그는 나를 프로 골프 선수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비 오는 날 젖은 골프웨어를 입고 골프화를 신은 채 숙소를 찾는 동양 여인이 심상치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슬리퍼로 갈아신은 내 발엔 양말 자국이, 박세리 선수 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모자를 벗으니 이마만 하얗고 나머지는 검게 그을린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뭣보다 한국에서 왔다지 않은가. 웨일즈 열혈 골프 청년의 머리 속엔 당연히 LPGA를 주름잡고 있는 한국 낭자 군단의 모습이 스쳤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도 새벽 골프를 나갔다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철수했다는 매니저는 날마다 우리를 대신해 날씨 걱정을 했다.

‘매일 비가 와서 어쩌냐, 웨일즈 골프장은 잉글랜드와는 달라서 꼭 경험해봐야 하는데… 웨일즈는 산이 많고 험해서 골프장도 매우 도전적이다. 잉글랜드와는 완전히 다른 골프를 즐길 수 있는데 너무 아쉽다.’ 늘 이런 내용이었다.

그의 극찬으로 말미암아 우린 웨일즈 일정을 대폭 늘렸고 그가 추천한 골프장을 찾아다녔다.

그랬다. 영국 안의 다른 영국, 웨일즈는 자연도 사람도 골프장도 다른 곳이었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