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채 급증 … 9년 만에 순채무국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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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외채가 급증하면서 조만간 우리나라는 받을 돈보다 빌린 돈이 더 많은 순채무국으로 전락할 판이다. 1999년 이후 9년 만이다. 이런 상태에서 외화가 부족해진 은행들은 여기저기로 돈을 꾸러 다니지만 사정이 좋지 않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에 따른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이 겹쳐 돈을 빌리는 비용(금리)이 자꾸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3개월 새 199억 달러 늘어=“외환보유액이 많고 (기업의) 부채 비율이 낮아진 것을 제외하곤 지금의 경제상황은 외환위기 당시와 흡사하다.” 11일 경제 위기론에 불을 지폈던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이 14일 위기론을 재차 강조했다.

수치만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3월 말 현재 만기 1년 이내의 단기외채와 1년 이내에 만기가 돌아오는 장기외채를 합친 유동외채는 2155억6000만 달러로 3개월 새 199억 달러가 늘었다. 외환보유액에서 유동외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3월 말 81.6%로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엔 이 비율이 무려 937%에 달했다.

또 올 1분기 중 해외에서 빌린 돈(대외채무)은 303억 달러 늘어난 반면 해외에 빌려 준 돈(대외채권)은 97억2000만 달러 증가하는 데 그쳤다. 늘어난 외채 가운데는 단기채무가 162억3000만 달러나 된다.

이에 따라 대외채권과 대외채무의 격차, 즉 순대외채권은 불과 149억5000만 달러로 줄었다. 같은 기간 52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대외채무의 증가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단기외채를 포함한 대외채무의 내용을 뜯어보면 총액만으로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시각이 많다. 최근 외채의 성격을 보면 단순히 국제수지 적자를 메우기 위한 빚이 아니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주로 조선사들이 선물환 매도 거래에 대응하기 위한 차입은 대외채권과 연결돼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유병훈 한은 국제수지팀 차장은 “보통 외환보유액 대비 유동외채 비율이 100% 이내면 안정적이라고 본다”며 “최근 증가한 대외채무에는 대외자산과 연계된 것이 많아 단순한 수치만으로 불안하다고 말하긴 곤란하다”고 말했다.

또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단순히 단기외채가 늘었다고 지금 상황을 외환위기와 비교하긴 무리”라며 “다만 짧은 시간에 급격히 늘어난 외채는 물가관리·금리운용 등에 충격을 줄 수 있어 더 늦기 전에 대응책을 마련해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중엔 외화 자금난=기업의 설비투자 등에 쓰이는 중장기 외화를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중장기 외화차입 여건을 나타내는 5년 만기 외평채 지급보증증권(CDS) 프리미엄은 12일 현재 0.94%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지난달 20일의 0.60%에 비해 0.34%포인트 급등한 것이다. 은행이나 기업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국민은행은 이달 초 3억~5억 달러 규모의 유로화채권 발행을 추진했다가 금리 조건이 너무 불리해 연기했다. 양동우 국민은행 자금부장은 “지금의 금리로는 채산성을 맞출 수 없다”며 “국제 금융시장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엔화 채권 발행을 추진했던 수출입은행과 하나은행 등도 발행을 무기 연기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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