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르포 ‘전주 상산고 24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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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고(교장 이현구)에 들어선 때는 해넘이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100대 정원에 꼽힐 만큼 잘 꾸며진 교정. 높은 언덕에 위치해 탁 트인 조망 속에 푸른 잔디가 황혼 빛에 어우러져 더없이 그윽한 풍경을 자아냈다. 이곳이 과연 공부벌레들로 소문난 상산고의 교정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에 2학년 오수정(16·사진)양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정이와 함께 상산고의 하루를 지나본다.


   오전 6시, 활기찬 음악과 함께 하루가 시작된다. 수정이는 피곤한듯 기숙사 침대 위에서 잠시 뒤척이다 겨우 잠자리를 떨치고 일어난다. 미리 정해진 순서대로 세면을 한 후 일과에 따라 학업 준비를 한다. 오늘은 양서 읽기 시간이 있다.
   어제 자정까지 겨우 다 읽은 카프카의 『변신』을 챙겨 넣는다. 사실 책이 어려워 다시 한번 봐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아무래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낼 것 같다.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교실로 들어섰다.
   오전 7시 40분부터 시작되는 아침 자율학습은 수학문제 풀이시간으로 정했다. 요즘 수학 점수가 안나와 2주에 한번씩 집으로 가 수학 과외 수업도 받는다.
   8시, 1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영어회화 특강을 위한 교실 이동으로 분주하다. 빡빡한 오전 시간표 가운데 3교시 국어 시간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낮 12시 즐거운 점심시간. 상산고의 점심시간은 1시간 30분으로 꽤 길다. 동아리 활동 시간으로 충분히 활용하라는 학교 측의 배려다.
   수정이는 교내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일주일 후 장애인 재활원에서 무료 공연이 있어 열심히 연습중이다. 1시간 정도의 연주 연습을 끝내고 오후 수업에 참여했다. ‘양서 읽기’ 시간에 발표할 주제를 생각하니 졸음마저 달아난다. 드디어 8교시 마지막 수업인 ‘양서 읽기’. 카프카의 『변신』에 그려진 현대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문제를 발표했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지적 받았다.
   5시 40분부터 저녁 식사가 시작됐지만 밥맛이 없다. 항상 확인하던 식단표도 오늘은 그냥 지나쳤다. 정신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기분도 전환할 겸 교정을 걸었다. 향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기분마저 상쾌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저녁 일과를 시작해야지….
   이후 6시 40분부터 8시 50분까지는 야간특강 시간이다. 친구 승현이는 TEPS 수업을 듣는다. 750점을 목표로 열심이다. 다른 친구들도 자신의 특강을 위해 뿔뿔히 흩어진다. 고등 미적분 등의 수학이나 현대시 특강이 가장 인기다.
   그러나 수정이는 교실에서 그냥 자율학습에 열중한다. 지난 학기에 수학 특강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혼자 문제풀이 하는 게 도움 될 것 같아서다.
   특강이 끝나고 기숙사 자율학습이 이어진다. 내일 있을 개인연구 수업 때문에 수정이를 포함한 5명의 조원들이 모였다. ‘포브스 지가 선정한 세계 5대 경영인의 성공전략’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수정이는 인도의 철강왕 ‘락시미 미탈(Lakshmi Narayan Mittal)’의 성공전략을 알아보기로 했다.
   열띤 토론 끝에 시간이 벌써 자정, 취침시간이다. 불이 켜진 방은 단체 벌점이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습관 때문에 애를 먹는 친구가 많았다. 가끔 습관을 고치지 못해 기숙사를 나가는 친구도 있다. 3년 전 상위권 성적의 선배 20명 정도가 자기들끼리 공부한다며 한꺼번에 나가 생활한 적이 있었단다. 그 선배들 대부분이 대학에서 떨어진 후로 기숙사를 제 발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수정이는 그래도 적응을 잘하는 편이다.
   “규율이 엄할 땐 엄하고 풀어줄 땐 확실하게 풀어주는 게 좋아요. 선생님들이 우리를 믿는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상산고에 들어온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라요. 과도한 경쟁이요?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죠. 상산고는 내 생애 최고의 추억과 선물을 안겨다 줄 것 같은 예감마저 드는 걸요.”
   고려대 정경학부 진학이 꿈인 수정이의 긴 하루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프리미엄 김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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