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ry,효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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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09면

KBS2 ‘상상플러스(이하 상플)’에 이효리가 새 MC로 등장한다기에 가슴이 잔뜩 부풀어서 방송일을 기다렸다. 이효리가 그동안 쌓아 올린 기대치를 생각한다면 그는 강호동이나 유재석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남자들만이 누려왔던 ‘MC계의 왕좌’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 만한 여왕 후보였다.

뚜껑이 열리고 TV 앞에 모여들었던 ‘이효리 팬’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상플’은 이효리에 대한 퀴즈를 출연자들이 주고받고, 짧은 반바지를 입은 이효리를 양반다리를 시켜 바닥에 앉히고 심지어 물에 빠트리기까지 하면서 그녀를 있는 대로 써먹었지만, “확인한 건 늘어가는 그녀 눈가의 주름뿐”이라는 시청자들의 냉소만 얻었다.

몸을 던져 망가진 이효리에게 원망을 돌리기에는 ‘상플’ 자체가 너무 안쓰러웠다.
‘시즌2’를 내세우면서도 앙상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보려 했던 프로그램이 너무 빈약해 보였던 것이다. 잠옷 입은 토크쇼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 내용만 늘어놓아 하품을 유발했다. 영어 동요 부르기는 ‘영어몰입교육’의 스트레스를 오락 프로에서까지 느껴야 하나 싶어 짜증을 부추겼다.

‘세대 공감 올드 앤 뉴’ 이후로 쇠락하는 기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상플’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상플 시즌 2’는 그저 여타 오락 프로의 요소들을 얼기설기 엮어 와서 개성을 잃으며 신통치 못한 조합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강력히 내민 이효리 카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오락 프로에서 이효리의 강점은 예쁜 수퍼스타이면서도 그동안 ‘못난이’ 캐릭터의 여성 MC들이 맡았던 ‘진상’스러움을 보여주는 파격에 있었다. 괜히 남자 게스트들에게 추근대는 척하거나, 손이나 어깨를 쓱 잡는다거나 하는 식의 능청스러운 행동을 하면서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게 만드는 매력이 이효리에게는 있다.

여자 아나운서 같은 조신함의 틀에 갇힌 사람들은 하기가 힘들고, 조혜련이나 박경림 같은 악역 이미지의 여자들이 하면 그냥 우스꽝스러워지는 제스처가 섹시 스타라는 권력을 가진 이효리가 하면 소탈함과 유쾌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역(逆)성희롱이 아니냐고 할 만하지만, 사실 그동안 TV 속에서 남자들이 당연한 것처럼 여자들에게 해온 민망한 언행들을 생각하면 이효리의 희롱에 꼼짝 못하는 남자들을 보면서 얄팍한 통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MC로 나설 때 내숭 없는 그녀의 소탈함은 자기의 몸을 낮추고 게스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돋보인다. 그런데 이번 ‘상플’처럼 이효리 자체를 떠받들고 중심에 놓아버리면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예쁜 것 다 알고 스타인 것 다 아는데 자꾸만 그걸 강조하면서 ‘이효리 효과’를 억지로 만들어 내려니 반감이 드는 것이다.
유재석이나 신동엽 같은 모범생 이미지의 MC들이 중심을 잡으면서 옆에서 예쁜 말괄량이의 파격 이미지를 보였을 때 돋보였던 이효리는, 비슷한 말썽꾸러기 악동 이미지인 탁재훈·신정환 사이에서 오히려 자기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 위치가 되자 어색해졌다.

이효리에게 조리 있고 무게감 있는 MC 역할은 어울리지 않는다. 탁재훈과 신정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셋의 조합은 그다지 신통한 화학 작용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셋 다 패스를 받아 치고 나가는 스타일인데 중원에서 공을 뿌려주는 사람은 없는 거다.

한편으로는 가수로서 무대 위에서 혹은 CF에서 범접하지 못할 섹시함의 아성을 구축해 놓고, 또 다른 한편 오락 프로에서는 그 이면을 보게 만드는 이효리의 MC로서의 강점은 어느 여자 스타도 비교할 게 못 된다.
그렇지만 ‘상플 시즌 2’처럼 그 가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어 보인다.
이효리의 강점을 제대로 살려 그를 우리에게 온전히 돌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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