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 FRB’ 공격수로 변신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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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축구에 비유하면 중앙은행은 골키퍼와 같다. 여간해선 직접 나서지 않는다. 적이 공격해 오면(금융시장 혼란) 우선 수비수(은행)들의 위치(금리·재할인율)를 적절히 조정한다. 간접적으로 경기(돈)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다 최종 수비마저 뚫리면 비로소 ‘최후의 수비수’(최종 대부자)로 나선다.

이런 중앙은행 롤모델의 ‘살아 있는 교과서’ 중 하나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다. 한국은행도 FRB의 틀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런 FRB가 요즘 달라졌다. 간접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나서기 일쑤다. 우선 파산 위기에 몰린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에 긴급 구제자금을 투입했다. 골키퍼로 치면 ‘골문’을 나선 꼴이다. 이어 그간 시중은행에만 개방하던 재할인 창구를 투자은행에도 열어 줬다. 투자은행은 일반 은행처럼 지급준비금을 쌓아야 할 의무도 없고, FRB의 엄격한 검사도 받지 않는다. 벌써부터 월가에선 투자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초유의 금융 위기를 맞자 FRB가 ‘도박’을 감행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골키퍼’ 로 치면 ‘중앙선’을 한참 넘어 적진 깊숙이 들어간 상태다.

문제는 그 다음 수순이다. 상당수 전문가는 결국 FRB가 모기지 증권(MBS)을 직접 매입하는 ‘마지막 선’을 넘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유력 인사들도 최근 잇따라 미 정부와 FRB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로버트 루빈(전 재무장관) 씨티그룹 회장은 21일 “주택 압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 투입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도 23일 “더 적극적인 정책이 절실하다”며 거들고 나섰다. 급기야 일본의 현직 장관까지 충고를 던졌다. 와타나베 요시미(渡邊喜美) 금융행정개혁상은 23일 “미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서 배워야 한다”며 “공적자금 투입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FRB의 공식 부인에도 이미 월가에선 예상 시나리오까지 그리고 있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의 창설자 빌 그로스는 24일 블룸버그통신에 “정리신탁공사(RTC)를 만드는 게 유일한 해법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RTC는 미국이 1989년 저축대부조합(S&L) 파산 때 도입했던 장치다. 당시 부실 처리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4900억 달러, 그로 인한 세금 손실은 750억 달러가 넘었다. 금융 감독체계의 개편도 예고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24일 미국 민주당이 ‘감시 사각지대’였던 헤지펀드, 비은행권 금융기관이 FRB의 상시 검사를 받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안 마련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공적자금 투입 시점은 언제가 될까. 한국금융연구원 신용상 거시경제연구실장은 “지원에 앞서 정확한 부실 규모 파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금융회사들의 부실을 확정한 뒤에야 공적자금 투입 수순을 밟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FRB의 변신에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파생금융상품이 초래할 수 있는 신용 위기의 파괴력을 드러낸 것”이라며 “현재 전문인력을 투입해 FRB의 대응과 그 효과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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