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도씨탈출기>11.92년 外貨상점에 처음간 姜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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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92년 3월10일자로 주석부 경리부 무역과 지도원이 됐다.당시 함북도 당 책임비서였던 장인(姜成山)이 힘을 써준 덕분이었다.
보통 이 자리는 중앙당 지도원도 언감생심 넘보지 못하는 자리다. 주석부 경리부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 5층건물 안에 있다.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의 식료품과 의복을 조달하는 것이 경리부 주요 업무다.
이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양복지.TV.냉장고는 물론 된장.간장.맥주.위스키 등 안 들여오는 것이 없다.
특히 일제 기코만 간장.겨자 등 양념과 향신료도 많이 들여왔다. 김정일이 워낙 일본 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물론 외국과무역거래 때는 경리부 대신 「능라 888」이라는 대외용 위장 명칭을 사용했다.
경리부는 또 지방에 각종 공장과 목장을 갖고 있다.평안남도 운곡 목장에서 생산한 우유.쇠고기.돼지고기를 호위총국을 통해 김일성.김정일에게 바친다.또 경리부는 별도로 선물과가 있다.
金부자는 정치행사를 많이 하는데 참가자들에게 가방등의 선물을주기 위해서다.품질은「북한 최고」다.
예컨대 김일성에게 바치는 각종 과자.제과류는 서울에 내놔도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능라888회사의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재미를 본 것은 일본.중국과의 「되거리」무역이었다.
되거리 무역이란 일종의 3각 무역이다.쉽게 말해 중고 자동차를 일본에서 헐값에 사다가 중국에 비싼값으로 되파는 것이다.
사업은 아주 잘됐다.우선 일본에서 3~4년된 중고 도요타 크라운을 대당 3천달러에 산다.이를 들여와 중국업자에게 약 8천~1만2천달러에 파는 것이다.한대에 보통 5천~9천달러가 고스란히 남았다.
자동차 무역이 짭짤하다고 소문이 나자 끗발 있는 정부기관 산하 무역회사들이 일제히 달라붙었다.
호위사령부의 해금강무역,사회안전부의 동흥무역,제3공병여단의 부흥무역, 그리고 심지어는 김정일 직속 39호실 7과와 정무원산하 금속공업부.경공업부등도 뛰어들었다.자동차를 어찌나 많이 들여왔는지 한때는 중국과 접경지대에 일제차가 꼬 리에 꼬리를 물고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아마 연간 수천대는 족히 수입했을것이다. 한때 없어서 못 팔정도로 잘되던 자동차 무역이 중단된것은 93년 6월.중국의 중앙정부가 평양에 거세게 항의해왔다.
이 때문에 북한은 고민에 빠졌다.이미 수천대를 수입해 국경지대에 쌓아둔 상태기 때문이다.결국 평양 당국은 『이왕 들 여온 자동차는 빨리 처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이 결정으로 북한~중국 자동차 밀무역이 시작됐다.
이 기간중 나는 함북지방에 출장갈 기회가 많았다.청진.나진항을 통해 들여온 자동차를 중국으로 넘기기 위해서다.자연히 선봉.혜산.온성지역 군당 책임 비서들과 친하게 지냈다.이들의 가장큰 애로사항은 타이어와 기름 부족이었다.도대체 뜨락또르(트럭)고 버스고 간에 자동차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담배를 많이 달라고 했다.막담배말고 필터가 제대로 달린 궐련 말이다.몰고다니던 도요타 크라운과 벤츠280에 외제 담배를 잔뜩 싣고다니며 담배 인심을 후하게 썼다.
개인적으로도 이때가 아주 풍족히 지낸 시기였다.우선 아파트를60평짜리로 옮겼다.지갑에는 항상 빳빳한 달러가 잔뜩 들어 있었다.그러자 당지도원,보위부에 있는 친구들이 자주 찾아왔다.
***담배.맥주 부족 주로 형제가 아프거나 결혼 등으로 돈을달라는 부탁을 많이해왔다.별 부담없이 1백~2백달러씩 주곤 했다.북한 집권층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물자난이다.
특히 술.담배.맥주가 턱없이 부족하다.
고위 당간부라도 이런 식으로는 못 논다.도처에 깔린 보위부와정보요원들이 중앙당에 재깍 보고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장인에게 용돈조로 달러를 얼마간 드린 적이 있다.그러자 장인은 외화상점에 가 일제 보온밥통.안마기,그리고 손자 옷가지를 사고 퍽이나 좋아했다.그러면서『사위 덕에 난생 처음 외화상점에 가봤다』고 했다.북한 정무원 총리가 그때 까지 단 한번도 외화상점에 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리=崔源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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