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지금이 개헌 논의의 적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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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두 달 전에 치렀던 대통령선거에서는 국민의 관심이 철저하게 인물과 이념에 집중돼 있었다. 특정한 집권자에 대한 실망과 부정적 평가는 새 인물, 새 지도자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과도한 이념화에 시달린 국민정서는 탈이념화된 실용주의, 보다 정확하게는 실용적 자세에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제도의 부실함에서 말미암은 한계를 과연 단순한 인물교체만으로 얼마만큼이나 극복할 수 있는지는 단언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정치의 과도한 이념화와 교조화는 위험하고 비생산적임에 틀림없지만 참된 정치란 이념의 공백 속에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원리도 간과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에 새 정부가 출범하는 이 시점이 한국의 민주정치가 지닌 제도적 한계는 무엇이며 이와 연관된 헌법 논의는 어떻게 전개하는 것이 옳은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 정치는 민주화에 일단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화 측면에선 높은 평점을 받을 수 없다고 자주 지적돼 왔다. 대표성·책임성·효율성이란 세 가지 척도로만 평가하더라도 우리의 정치 실태는 실망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대의제도의 핵심인 의회제도나 정당제도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국민의 불신은 이미 위험 수위에 도달한 지 오래다. 국민이 자의에 의해 뽑아 놓은 국회의원들인데도 존경이나 신뢰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누구의 이익과 권리를 어떻게 대표하는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는 형편이다.

우리의 정당제도가 얼마나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는 지난 몇 해 동안 이른바 여당이 보여준 난맥상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편, 국가 운영의 전권을 맡고 있는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는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현행 ‘대통령무책임제’는 바로 한국 정치의 무책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정치의 생산성이나 효율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이러한 한국 민주정치의 한계는 남북 분단을 비롯한 정치사, 정치문화, 정치환경의 특수성으로 설명될 수도 있지만 헌법의 차원에서 신중히 재검토돼야 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건국 60주년이면서 헌법 제정 60주년도 함께 맞는 해이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의 헌법은 수많은 정치적 변고를 겪으며 우여곡절의 거울 역할을 도맡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19, 5·16, 5·18 등 정치적 요동기를 지날 때마다 헌법은 개정되었고, 이른바 87년 체제의 토대인 지금의 헌법도 6월항쟁의 산물이었다. 이렇듯 개헌을 일궈낸 일련의 헌법 논의가 늘 비상사태의 결과물이었다면 대통령이나 정치권 일각에서 가끔 제기했던 개헌 논의는 그 시기의 부적절함이나 의도의 불순함으로 인해 별다른 결과 없이 사그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한국 민주정치의 정상적 발전과 제도화에 대한 얼마간의 여유가 생긴 지금이야말로 이른바 ‘개헌 알레르기’를 극복하고 헌법제도의 개선을 위한 국민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적기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당선인은 대통령 취임 즉시 헌법제도의 조사 연구를 위해 여야를 초월한 대통령위원회를 한시적으로 발족시켜 내년 말까지 헌법 개정의 필요성과 타당성 여부 및 개정의 몇 가지 대안을 국민에게 제시해 정치 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기 바란다. 새롭게 출발한 야당의 손학규 대표도 이에 긍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더불어 4월 총선 후에는 여야 합의로 한시적인 헌법특위가 국회에서도 가동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