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너도나도 ‘어린이를 위한 … ’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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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시크릿』이 나왔습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솔직히 쓴웃음부터 나왔습니다. 어른 책으로 인기를 끌었다 싶으면 ‘어린이를 위한’이란 수식어를 붙인 책을 만들어내는 게 유행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배려』 『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 『어린이를 위한 내려놓음』 등은 모두 어른 책 『배려』 『마시멜로 이야기』 『내려놓음』의 성공에 힘입은 기획이지요. 그 밖에도 『어린이를 위한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 『어린이를 위한 인생수업』 『어린이를 위한 이기는 습관』 등 베스트셀러에서 유래된 ‘어린이를 위한’ 책은 셀 수 없습니다.

제목만 보면 어른용 책의 내용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쉽게 풀어냈으리라 짐작되지만, 실은 별 상관없는 내용일 때도 많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시크릿』도 그런 경우지요. 지난해 6월 출간된 『시크릿』은 지금까지 80만부 넘게 판매된, 지난해 최고의 베스트셀러입니다. 호주의 전직 TV 프로듀서 론다 번이 ‘끌어당김’을 키워드 삼아 부와 성공의 비법을 풀어낸 책이지요.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하고 집중하는 대상이 실제 삶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가령 이미 부자가 된 것처럼 상상하고 돈을 좋게 생각하면 돈이 더 많이 들어오고, 완벽한 몸무게가 된 것처럼 상상하고 자신을 좋게 느끼면 원하는 체중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 『어린이를 위한 시크릿』은 경영·교육 컨설팅 전문가 윤태익 박사가 쓴 어린이용 자기계발서지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재능을 찾고,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되다는 등의 교훈을 전합니다. 성인용 『시크릿』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면 표지 뒷면에 적힌 ‘단 1% 비밀’이란 문구 정도랍니다. 그런데도 제목에 ‘시크릿’을 붙일 수 있었던 건 아마 작품 속 비밀학교 선생님의 이름이 ‘시크릿’이어서인가 봅니다.

사실 출판계의 잘 나가는 책 ‘따라 하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외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죠. 또 모방은 제2의 창조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이겠죠. 베스트셀러의 제목만 슬쩍 빌려다 어린이용으로 둔갑시키는 건 ‘지식산업의 총아’ 출판의 소임이 아닐 듯 합니다. 아이들에게 콘텐트보다 편법부터 가르치는 것, 어쩐지 부끄럽지 않으신가요.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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