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읽기] 발터 벤야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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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인간의 사유는 일정한 체계적 논리와 그에 바탕한 통시적인 역사인식을 기초로 행해진다. 그런 만큼 인간의 삶 자체도 모종의 논리체계 안으로 포섭되고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구조적 패턴은 비단 학문적 사유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부분들을 아우르며 인간의 조건을 제한한다. 모든 사회시스템은 편의를 가장한 억압이자 질서를 빙자한 일방적 훈육체계가 되기도 한다. 1940년 나치의 핍박을 피해 망명을 감행하다 피레네 산맥에서 자살한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초반 격동기의 유럽 한복판에서 현대사회의 그러한 이중성을 섬뜩하게 투시한 명문(名文)들을 남겼다.

1928년 독일 로볼트 출판사에서 출간된 『일방통행로』(새물결)는 벤야민의 후기 사상을 집약한 단상들로 ‘직조’된 책이다. 이 책은 어떤 일반적 체계에 따른 순차적 얼개가 아니라 커다란 원환(圓環) 안에서 의미의 폭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는 유기체적 순환궤도를 따르고 있다. 벤야민은 근대적 삶의 원형이 생성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 유럽의 도시 풍경을 주마간산하며 이전 세기와는 다른, 화려한 언어적 효과와 삶의 태도를 통찰해냈다. 아래는 책의 처음을 여는 ‘주유소’란 단장의 첫 문장이다.

“지금 삶의 구성은 확신보다는 훨씬 더 사실들의 권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거의 한 번도, 단 한 번도 확신의 토대가 되어보지 못한 사실들에 의해.”
 
산업 테크놀로지 시대의 태동기를 맞아 세계는 이전의 언어적 양상으로는 다 좇을 수 없는 방향과 속도를 생산해냈다. 그런 시대에 고루한 지적 엄숙주의와 그에 따른 관성적 사유로는 시대의 정확한 얼굴을 그려낼 수 없다고 벤야민은 생각했다. 때문에 그가 주목한 언어적 형식은 “전단지, 팸플릿, 신문 기사와 플래카드” 등이었다. 이를테면 신경과 감각의 첨단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즉물적 언어의 파장만이 다른 사유의 길을 낼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핍박과 당대의 편견 속에서 외면당한 학문적 자존심, 그리고 불행했던 연애사들이 겹치면서 그는 더더욱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모험을 삶과 글 모두에서 실행해내었다. 흔히 ‘아케이드 프로젝트’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지적 통찰과 상상력이 결합된 미완의 기획은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이 세계의 총체적 원리를 투사해 삶을 근본부터 혁신하려 했던 필생의 사업이었다.

벤야민 사후(死後) 많은 인용자들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은커녕 시작도 못한 프로젝트’라 일컫는다. 벤야민은 잘 짜인 구조 안에서 일관성 있게 정리된 게 아니라 엄청난 분량의 메모만을 남겼을 뿐이다. 때문에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어떤 형식도 찾지 못한 채, 당대 유럽의 문명을 전방위로 통찰하는 무수한 걸개처럼 산개하며 시대를 초월해 반향한다. 미국의 벤야민 연구가 수잔 벅 모스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를 통해 벤야민의 지적 유산들을 현대에 복원하며 그 원대한 구상을 재구성한다. 이 책은 단순한 벤야민 연구서를 넘어 다시 씌어진 현대 도시문명의 도해이자 만화경이다. 수잔 벅 모스는 벤야민이 주유했던 20세기 초의 유럽과 온갖 물신(物神)의 전시장이 된 현대사회의 풍경들을 접속하고 전도시키고 확장하며 새로운 사유를 폭발케 한다.

책의 안팎을 넘나들며 진동하는 대뇌와 쉼 없이 발기하는 감각의 최전선들. 당신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씌어질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어쩌면 당신이 선택하고 관여하는 현재의 모든 사건들 속에 수없이 명멸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강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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