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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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오뉴월은 그야말로 우리가 빈둥거리기에 딱 알맞은 계절이었다.
우리들의 스무살은 여름처럼 뜨겁지도 겨울만큼 썰렁하지도 않았다.그렇다고 무슨 희망에 찬 봄같은 시절은 더더욱 아니었다.우리는 아직 본격적인 어른은 아니었으므로 화끈하게 놀지도 못했고,고3때처럼 한숨을 토하며 썰렁하게 책상머리에 쪼 그리고 앉아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그렇다고 무슨 내일이 보장돼 있어서 막연히 세월이 흐리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렇게 속편한 젊음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스무살은 오뉴월처럼 애매한 시절이었다.오뉴월이란 4계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생각하면 어쩐지 우울해져 버리는 그런 계절이었던 거였다.대학생이고,그것도 후진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란 정말이지 아주 애매한 존재였던샤 거였다.
하여간 우리는 열심히 빈둥거렸다.그 즈음의 우리란 소라와 윤찬이와 희수를 뜻했다.윤찬이를 찾기 위해서는 희수가 있는 곳을알면 됐고…걔네는 둘이만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는지도 몰랐지만…,소라는 여럿이 떼지어 다니는 걸 좋아했기 때 문에…소라는 친구들과 패거리를 해서 어울려다녀본 게 처음이라고 했다…,우리는 주로 넷이서 함께 무얼 먹거나 마시거나 볼링을 치거나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가거나 그랬다.
우리는 어지간한 수업을 제끼는 데에 망설이지 않았고,버스나 전철을 타고 돈암동의 성신여대 앞 카페골목에 가서 두리번거리거나,신촌의 이대나 연대나 홍대 입구를 어슬렁거리거나,압구정동이나 방배동 아니면 인사동을 배회하였다.신림동의 순 대집이나 신당동의 떡볶이집들을 순회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우리는 건수와 별볼일 찾아,아니 어쩌면 그저 시간을 죽일 수만 있다면 어디에도 갔고 무슨 짓이든지 했다.
윤찬이와 희수는,깊은 관계가 된 것도 같았고 아닌 것도 같았다.때로는 윤찬이가 희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희수가 윤찬의 허리에 손을 감은 진한 체위를 하고 길을 걷는가 하면,때로는 처음 미팅에서 만난 아이들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 면서 어색하게 걷기도 하였다.희수와 윤찬이가 진한 자세로 붙어서 길을 갈때면 소라와 나는 괜히 갑자기 어색해져서 각자 길에 연한 쇼윈도를 보면서 걷고는 하였다.
어느날은 넷이서 레몬소주 몇잔을 마시고 헤어지려는데,윤찬이가내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같이 갈 데가 있다고 했다.여자애들이먼저 가고 나서,윤찬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천호동의 텍사스골목이었다.아마도 윤찬은 아직 희수를 어쩌지 못한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두해 전에 거기 갔을 때 만났던 여자애가 떠올랐다.빨간미니스커트에 소매가 없는 티셔츠…가슴께까지 늘어뜨린 머리…마른버짐이 피어있던 얼굴…열다섯이나 됐을까 싶던 계집아이가 그랬었다. 『빨리 빨리 해요.난…말하는 거 싫거든요.』 이번에는 그렇게 어린 여자가 아니었다.나는 소라와 하영이와 써니의 얼굴이떠올라서 여자를 막 벗기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희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왜 윤찬이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걸까.전에 윤찬이가 내게 말해줬었다.아버지의 차를 가지고 희수와 둘이 춘천에 갔었는데,분위기가 무르익으니까 희수가흐느끼며 울더라는 거였다.안된다고,무섭다고,빨리 집에 데려다달라고 난리를 치더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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