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실에서 태어난 아디다스의 성공
내 이름은 아디다스.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나는 세계 최고의 신발이지. 하지만 나는 비좁은 세탁실에서 태어났지. 그때만 해도 아무도 내가 이렇게 지구 위를 위풍당당하게 누비고 다닐 줄은 몰랐어.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나는 축구화도 아니었고, 러닝화도 아니었어. 바로 군화였지. 군수용품의 하나로 강제 제작됐거든. 하지만 나는 꿈을 접지 않았어. 나의 꿈은 전장이 아니라 동네 공터와 학교 운동장, 그리고 올림픽 경기장이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지금의 나를 봐. 나는 전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화가 되었잖아.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선 건 그로부터 4년 뒤. 아돌프는 신제품 개발과 제작을, 루돌프는 경영을 전담하기로 했다. 그 이듬해인 1925년에 아돌프는 드디어 대단한 ‘사고’를 하나 친다. 그것이 바로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아돌프는 이 신발로 특허권을 따냈는데, 단지 신발 특허권이 ‘사고’였던 것은 아니다. 아돌프의 과학적 사고와 통찰력이 제대로 만나 빛을 발한 결과가 바로 날씨와 운동장의 조건에 따라 신발을 각기 다르게 조립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었다.
아돌프와 루돌프의 스포츠화를 신은 선수들은 속속 올림픽의 영웅이 되었다. 1932년 마라톤 선수 아더 요타트가 아돌프의 스포츠화를 신고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고, 4년 뒤 베를린 올림픽에는 제시 오웬스가 무려 4개의 금메달을 땄다. 메달이 빛날 때마다 아돌프의 신발도 함께 빛났다. ‘Dassler Brothers OHG’는 그렇게 단숨에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본래 가죽 신발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발 끈을 발등 위로 세 번 돌려 묶는 모습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아디다스를 상징하는 ‘삼선’ 로고가 되었다.
신발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두 형제의 반목은 평생 동안 이어졌고, 두 형제의 크지 않은 고향 마을도 둘로 나뉠 정도였다. 두 업체의 화해무드는 1980년대에 와서야 조성되는 듯 했지만, 여전히 구원舊怨은 남아있다.
아디다스의 축구화로 말할 것 같으면, 아디다스를 오늘날의 아디다스로 만든 일등 공신이라 할 만한데, 때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 결승전에서 헝가리와 맞붙은 서독은 경기 내내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축구를 해야 하는 선수들을 위해 아디다스는 징을 교체할 수 있는 축구화를 선수들에게 신겼는데 평소보다 긴 징을 장착했다. 서독은 헝가리에게 2-0으로 뒤지는 경기를 펼치고 있었는데 후반 38분 동점골을 이끌어내면서 ‘베른의 기적’을 예고했다. 축구 역사에서도 1954년의 경기는 매우 의미심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축구 영웅들의 탄생으로 환호했으며, 유럽의 축구 강호 헝가리는 이 경기 이후 점차 쇠락을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스포츠화의 전설을 기록해오던 아디다스에게 위기의 시절이 있었다면 아마 1990년대였을 것이다. 당시 아디다스는 1억 5천만 마르크에 이르는 적자를 기록할 정도였다. 브랜드 이미지는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 있었다. 나이키의 독주체제를 아디다스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은 시기였다. 하지만 최고 경영자로 취임한 로베르트 루이스 드레퓌스의 경영 혁신을 통해서 위기를 넘기고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 자리를 놓고 나이키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아디다스가 나이키와 벌이는 경쟁을 지켜보는 건 스포츠 경기만큼이나 짜릿하다. 관전 포인트는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이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의 CI “IMPOSSIBLE IS NOTHING”대로 불가능,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지 확인하는 데 있다. 스포츠화로서 아디다스가 쓰는 역사 그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다.
객원기자 정유진 yjin78@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