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신발 이야기 ③ - 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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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이나 귀족 등 호화계층의 사치품으로 생산된 명품들과 다르게 조금은 엉뚱한 계기로 인해 탄생한 명품신발이 있다. 185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명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폭 넓게 사랑받고 있는 신발 ‘발리’가 그렇다. 발리 슈즈의 탄생 스토리는 꽤나 로맨틱하다. 한 편의 작은 동화 같기도 하다. 보시라.

1850년 스위스 쇠넨베르트에는 고무리본 제조업을 하는 발리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었다. 발리는 종종 파리로 출장을 떠나곤 했는데 매번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선물을 사다주었다. 당시 유럽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패션 잡화 제품이 대부분 파리에 모여 있었으므로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발리는 선물을 받고 기뻐할 아내를 떠올리며 이름난 프랑스 디자이너의 옷을 정성스레 골랐다.
아내는 남편의 선물이 언제나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고생해서 번 돈으로 비싼 옷을 사는 데 없애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물하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살림꾼 아내 사이에서 투닥투닥 가벼운 실랑이가 자주 벌어지곤 했다.

아내의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발리는 일부러 공장 자재들을 숨기고 아버지에게는 공장 자재가 다 떨어졌으니 파리에 다녀와야겠다고 둘러댔다. 아들의 속내를 이미 눈치 챈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슬쩍 무엇이 갖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소박한 살림꾼인 며느리였지만 그녀에게도 탐나는 물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아름다운 신발’이었다. 물론 이 한 마디가 훗날 엄청난 드라마를 만들어내게 될 줄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버지에게서 아내의 마음을 엿들은 발리는 그 길로 파리로 달려가 유명 구두 가게를 찾았다. 그러나 가게에서 가장 예쁜 신발을 고르다 말고 발리는 이마를 치며 난감해 했다. 아내의 발 사이즈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대로 돌아서기란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발리는 여러 가지 사이즈의 신발을 닥치는 대로 골랐다. 집으로 돌아올 때 그는 모두 열두 켤레의 신발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열두 켤레 중에서 아내의 발에 딱 맞는 신발은 없었다. 남몰래 한숨을 짓는 아내를 보며 자신이 원망스러워진 발리는 신발들을 공장으로 가져와 몇날며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헌데 문득 발리의 머릿속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구두 사이즈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공장 작업대에 널려 있는 고무 밴드를 신발에 덧대어 보았다. 필요한 부분마다 고무 밴드를 덧대자 아내의 발에 딱 맞는 구두 열두 켤레가 생겼고 아내는 그 어떤 선물을 받을 때보다 더 기뻐하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이것이 발리가 구두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구두 하나에 울고 웃는 아내를 보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신발을 만들어보겠노라 다짐했다. 편안한 신발의 대명사 ‘발리’가 창시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고무리본에서 구두로 업종을 전환하자마자 수제화 만드는 기술자들을 공장으로 끌어 모았다. 고무를 만지던 발리의 뛰어난 제작술과 수제화에 능통한 기술자들의 만남은 실로 대단했다. 발리 이전까지는 누구도 신발에 고무소재를 덧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슬럼프도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언제나 뜨거울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발리는 수많은 기술자들을 만나며 편안한 신발 만들기에 매진했으며, 그러는 동안 발리의 신발은 곧 장인의 신발이라는 인식을 얻으며 연구에 매진했다. 자신의 이름 칼 프란츠 발리를 딴 ‘C. F. 발리’ 브랜드가 고급 수제화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857년의 일이다.

오늘날에도 발리 슈즈는 한 켤레를 제작하기 위해서 120~200여 가지의 공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초정밀 고성능의 기계도 장인의 솜씨를 복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의 발에 가장 잘 맞는 신발을 위해서 장인의 손은 발리의 공장에서 여전히 분주하면서도 정성스럽다. 메르세데즈 벤츠를 만드는 공정과 맞먹는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발리의 장인정신은 그의 고향인 쉐넨베르트 슈즈 박물관에서 그의 초창기 신발들과 함께 기리고 있다. 발리의 신발뿐만 아니라 유럽 신발의 변천사와 진귀한 신발의 변천사도 감상할 수 있으니 스위스 여행에서 빼놓는다면 섭섭할 일이다. 신발 디자인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면 사전에 전시 스케줄을 미리 체크해서 기획전시전을 놓치지 말자.

사진 및 자료 - 대한항공 홍보실 , 스위스 문화관.

객원기자 설은영 srk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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