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남편의 선물이 언제나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고생해서 번 돈으로 비싼 옷을 사는 데 없애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물하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살림꾼 아내 사이에서 투닥투닥 가벼운 실랑이가 자주 벌어지곤 했다.
아내의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발리는 일부러 공장 자재들을 숨기고 아버지에게는 공장 자재가 다 떨어졌으니 파리에 다녀와야겠다고 둘러댔다. 아들의 속내를 이미 눈치 챈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슬쩍 무엇이 갖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소박한 살림꾼인 며느리였지만 그녀에게도 탐나는 물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아름다운 신발’이었다. 물론 이 한 마디가 훗날 엄청난 드라마를 만들어내게 될 줄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버지에게서 아내의 마음을 엿들은 발리는 그 길로 파리로 달려가 유명 구두 가게를 찾았다. 그러나 가게에서 가장 예쁜 신발을 고르다 말고 발리는 이마를 치며 난감해 했다. 아내의 발 사이즈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대로 돌아서기란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발리는 여러 가지 사이즈의 신발을 닥치는 대로 골랐다. 집으로 돌아올 때 그는 모두 열두 켤레의 신발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발리가 구두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구두 하나에 울고 웃는 아내를 보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신발을 만들어보겠노라 다짐했다. 편안한 신발의 대명사 ‘발리’가 창시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고무리본에서 구두로 업종을 전환하자마자 수제화 만드는 기술자들을 공장으로 끌어 모았다. 고무를 만지던 발리의 뛰어난 제작술과 수제화에 능통한 기술자들의 만남은 실로 대단했다. 발리 이전까지는 누구도 신발에 고무소재를 덧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슬럼프도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언제나 뜨거울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발리는 수많은 기술자들을 만나며 편안한 신발 만들기에 매진했으며, 그러는 동안 발리의 신발은 곧 장인의 신발이라는 인식을 얻으며 연구에 매진했다. 자신의 이름 칼 프란츠 발리를 딴 ‘C. F. 발리’ 브랜드가 고급 수제화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857년의 일이다.
발리의 장인정신은 그의 고향인 쉐넨베르트 슈즈 박물관에서 그의 초창기 신발들과 함께 기리고 있다. 발리의 신발뿐만 아니라 유럽 신발의 변천사와 진귀한 신발의 변천사도 감상할 수 있으니 스위스 여행에서 빼놓는다면 섭섭할 일이다. 신발 디자인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면 사전에 전시 스케줄을 미리 체크해서 기획전시전을 놓치지 말자.
사진 및 자료 - 대한항공 홍보실 , 스위스 문화관.
객원기자 설은영 srkn77@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