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국민의 선택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호 27면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91년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걸프전을 막 승리로 이끈 막강한 현직 대통령(아버지 부시)을 이길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선 출마의 결심을 굳힌 클린턴은 정치·외교적 업적은 물론 국민적인 지명도에서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현직 대통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부시의 약점이 경제에 있음을 간파했다.

당시 미국 경제는 걸프전을 고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성장은 둔화됐고, 실업이 늘었다.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산층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불안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nomy, stupid)’란 클린턴의 캐치프레이즈는 이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문제는 이 구호를 어떻게 손에 잡히는 공약으로 만들 것이냐였다. 클린턴은 로즈장학생 동기인 당시 하버드대 케네디 정부정책대학원의 교수 로버트 라이시를 부른다. 클린턴은 91년 간행된 라이시의 명저『국가의 일(the Work of Nations)』을 보고 진작부터 그를 점 찍어 두고 있었다.

라이시는 사람에 대한 투자를 꼽았다. 경쟁력 있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기업들이 투자와 생산을 늘릴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는 얘기였다. 클린턴의 선거참모들은 라이시의 제안을 ‘사람 우선(Put People First)’이라는 선거캠페인 구호로 포장했다. 그에 따라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일자리 만들기 공약이 만들어졌다.

워싱턴 포스트의 대기자 밥 우드워드는 95년 클린턴 정부의 경제정책을 다룬 '어젠다(the Agenda)'에서 대선에서의 의제 설정과 준비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소상하게 보여준다. 클린턴과 그의 참모들은 대선 1년 전부터 아칸소 주지사 관저의 지하방에 모여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막연히 ‘경제 대통령’이라거나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식의 공허한 구호를 만든 게 아니었다. 후보가 제시한 의제는 당내 경선(예비선거)과 후보 간 토론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검증되고 세밀한 공약으로 다듬어진다. 그 과정에서 국민은 후보가 내세우는 공약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고, 당선 이후에 그 공약을 실천할 능력과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선거일을 불과 한 달 남짓 남겨놓은 우리나라 대선에선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공약은커녕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준비조차 없이 당을 뛰쳐나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다. 국민은 그가 이끌어가겠다는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그러니 실천력은 따져볼 수조차 없다. 이씨의 출마로 대선판이 요동을 치면서 그나마 기존 후보들 간에 이루어졌던 정책 대결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대선판은 이제 구태의연한 지역주의와 저열한 네거티브 공방으로 변질됐다.

대통령 선거는 일반국민이 5년 만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정치과정에 투영하고 후보들에게 이를 실천토록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후보들의 공약은 바로 그 국민적 선택권을 담보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국민은 그런 호사를 누릴 기회를 잃고 있다. 최종 대진표도 모르고 제대로 된 공약도 모른 채 투표장에 나가야 할 판이니 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