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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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방학이 반이나 지나 있었다.
내가 섬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어머니와 어쩐 일인지 일찍 집에 들어온 아버지와 나 이렇게 셋이서 저녁식탁에 둘러앉게 됐을 때였다.아버지는 내게 섬 여행에 대해서 몇가지를 건성으로 물었고,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거실에 앉자고 그러셨 다.
『요즘에 너한테 고민이 있다는 거 들었어….행방불명이 된 친구를 찾아다니는 것도 헛된 일은 아니겠다마는….』 아버지는 대강 어머니한테서 들은 모양이셨다.여자친구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만 했는데,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훨씬 근사하고 의리가 있는 놈처럼 들렸다.아버지는 아직 나하고 여자친구 문제를 가지고 정면대결을 할 자신은 없으신 것 같았다 .어쨌든 아버지의 결론은,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에 제대로 살고 있는 걸 보여주는 게그 친구에게도 좋은 일일 거다 하는 논리셨다.
나는 그 다음 이틀을 하루종일 내 방에 꼭 틀어박혀서 지냈다.써니를 생각했고 열일곱살 반이라는 내 나이를 생각했고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라는 썰렁한 시절을 생각했고 그리고 막막한 내일을 생각했다.
내가 왕박사를 독서실로 찾아간 건 밤 열시가 지나서였다.
섬에서 돌아온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온종일 방안에서 서성이면서 왔다갔다 하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딴짓을 하거나 연습장에 말도 안되는 계획표를 짜다가 던져버리고 침대에 자빠져 있거나 하다가,퍼뜩 왕박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왕박은 독서 실에 갔다고왕박의 엄마가 그러셨다.
『나 독서실을 좀 알아보고 올게요.』 내가 전화하는 걸 옆에서 들었을 어머니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왕박은 독서실의 자기자리에 앉아서 성문종합영어에 이마를 들이박고 잠들어 있었다.
『야 임마,너 이러라고 독서실에 보내는 거 아니다.』 내가 왕박의 등짝을 탁 쳐서 깨우고는 풀어진 자세를 지적하였다.왕박은 눈을 부비면서 우선 시계부터 보았다.왕박의 자리 전면 칸막이에 시간표가 붙어 있었는데 잘 보니까 밤 9시부터 11시까지는 「잠」이라고 돼 있었다.
『멍달수가 웬일이야.이런 델 다 오고….』 『11시부터 새벽3시까지 공부를 한다 이거냐.이 시간표….』 『꼭 그러지 않을때도 있어.정 졸리면 또 자는 거지 뭐.』 이렇게 말하는 게 왕박의 매력이었다.그래서 나같은 악동도 왕박과 친하다고 느낄 수 있는 거였다.
『야 나 말이야….』 사실 난 어느정도 쑥스럽기도 했다.
『이제 슬슬 공부를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니가 시험칠 때마다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는 것두 아니구….』 『글쎄 그 머리같구 될까.공부라는 거 너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구.』 『너 나 국민학교 2학년 때 반에서 8등까지 한 적도 있는 거 모르지.』 『정말?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왕박이 빙그레 웃었는데 내 결심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왕박의 그런 얼굴을 보는 건 내게도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그래 나는 우정 같은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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