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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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말했듯이,내가 어머니의 매로부터 문득 해방된 건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회초리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 매를 완전히 잊게 만들어 주시지는 않았다.어머니가 나를 더이상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얼마 뒤부터 대 학생인 가정교사가 우리집에서 먹고 자면서 형과 나의 공부를 봐줬는데,해병대에 다녀온 아주 무서운 가정교사였다.나는 어머니에게 터지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터지거나 벌 서거나 하였다.
나는 그 가정교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아마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번도 알고 지낸 적이 없었던 것같다.형과 나는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만 했으니까.그 가정교사가 나를 때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나는 그이의 이름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이는 좋은 사람이었고 의리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름정도는 알아둘만한 분이었던 거였다.
어쩌면 형은 그 가정교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거나 어쩌면 요즘에도 가끔 서로 연락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왜냐 하면 형은 그이를 꽤 우러러보는 것 같았으니까.나는 그이가 우리집에서나간 이후 그이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 았다.
그 가정교사는 4년쯤 우리집에 있었다.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하고 나서도 한동안 우리집에서 지낸 셈이었다.그이가 처음 우리집에서 지낸 몇 년쯤은 그런대로 우리집의 경제사정이 괜찮았지만,그 뒤로는 그렇지 못했다.나야 아직 어려서 심 각한줄 몰랐지만 사실 대책없는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웃기는 건 그이가 우리집에서 나가지 않고 오히려 우리집을 경제적으로 도와주었다는 사실이었다.형이 언젠가 나중에 말해준 건데,한번은 방학 때 대구의 그 가정교사네 집에 함께 내려간 적이 있었다고 했다.그런데 굉장히 큰 저택에 살고 있는 부자였다고 했고 또 아주 격을 찾고 절도를 지키는 분위기의 집안이었다고 했다.
형이 그러는데,그이는 자기의 아버지에게 우리집안 사정을 설명해서 적지 않은 돈을 어머니에게 보태주었다는 거였다.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그래서 그 이가 내게 그렇게 엄하게 굴 수 있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하여간 나는 그 이야 기가 사실인지 어쩐지도 어머니에게 확인해본 적이 없다.
『달수 널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이가 나를 벌세우면서 하던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그즈음에는 주로 학교를 파하고 집에 늦게 돌아온다고 혼났는데,손을 들고 서있다가 힘이 들어서 손을 내리면 그때부터 몇대씩 얻어터지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나도 정말이지 그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왜 그렇게 끈질기게 그이가 나를 이해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였다. 하여간 내가 어머니에게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순순히 얻어터지지는 않겠다고 선언한건 중학교 3학년 2학기 즈음이었다.나는 형과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각각 내 의사를 진지하게 전달하였다.공식적인 이유는 우선 매가 너 무 아프고 또 아주 쪽팔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중학교 졸업식 사진을 보면 어머니와 형만이 참석했는데,그러니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그 가정교사가 우리집에서 나간 게 맞을 것이다.어머니는 내 선언을 무시하지 않은 거였다.그러니까 그 졸업식이 내게는 아주 의미깊은 행사 였다.
나는 바야흐로 우리집에서 어른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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