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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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는 불을 끄지 않았다.형이 이상없이 잠든다면 그때 불을 꺼야겠다고 생각했다.형에게 자기방에 가서 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우리는 천장을 향해 나란히 누웠다.
형은 영어로 무언가를 띄엄띄엄 중얼거리고 있었다.나는 또 잠든 척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시야.어떤 거냐 하믄….』 웃는다는 게위험한 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거구 운다는 게 위험한 건 유치해보일 수도 있다는 거구 누군가의 곁에 있다는 게 위험한 건 섞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구 시도한다는 게 위험한 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거구 그리고… 사랑한다는 게 위험한 건 다시 사랑하지 않았던 때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거구… 그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옛날 영화에서 여주인공 클라이드가 사랑하는 보니에게 들려주던 그 시가 아닐까 형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그래도 나는그냥 잠든 척하고 있었다.영화 맨 처음에 나오던 말이 생각났다.「멋진 내일을 위하여 오늘은 언제까지나 참고 살아야 하는가」.기관총 소리,핏덩이로 쓰러지는 보니… 어쨌든 형은 이제 다른 이야길 지껄이고 있었다.
『그날은 눈이 왔었어.그것도 아주 눈부시게 새하얀 눈이었어.
… 망할 놈의 눈이… 그래 펑펑 쏟아졌단 말이야….』 형은 그러다가 못참겠는지 숨을 몰아쉬었고,간간이 신음소리를 토해냈고,그러다가 잘 알아 듣지도 못할 쌍소리들을 마구 내뱉었는데,그건대개 뭇사람들에게 향한 욕들이었고,그 뭇사람이라는 무리에는 나와 아버지와 엄마는 물론 형 자신까지도 포함돼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난 사실 마음이 약해서 이런 짓도 못해.오늘은 술 덕분이지.』형이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난 말이야,하여간 한번좋아하기 시작하면 감당하지 못하는 거 있지.달수 넌 그러지 말라구… 알았어?』 형이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나를 흘긋 보았다.사랑이니 어쩌구 하지 않는 형이 좋았다.
엄마가 용케도 약과 붕대를 구해가지고 들어왔다.
『이제는 잠들기만 하면 된다니까 그래요.』 형이 몸을 반쯤 일으키면서 중얼거렸다.
피에 엉겨붙은 손수건을 떼어내면서 나는 호기심이 가득하다.나는 하마터면 소리내서 웃을 뻔했다.형의 반쯤 남은 새끼손가락은귀엽고 우스꽝스러웠다.사실이 그랬다.엄마가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형은 입술을 깨물었고… 붕대를 감고 … 엄마는 냉정한 간호사처럼 아무 말없이 방을 나갔다.형과 나는 아까처럼 다시 누웠고,나는 아무리 해도 달리 할 말이 없다.
『아버지가 용서해줄까.』 형이 말하는 용서는 이제 또 다른 의미의 용서같았다.
형은 더 말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나중에는 빨간 것이 온통 그만 까맣게 되는 것이 그런 게 자꾸만 되풀이되다가 우린 어느새 잠드는 거야….
형의 감은 눈 위에서 색들이 엉킨다.
불을 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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