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시 핵보유 근거마련 의혹/일 “핵무기사용 합법” 왜 주장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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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 핵우산 전제 안전보장 확보/「위법」 단정땐 일 자체 혼란도 이유
『핵무기 사용이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최근 일본 외무성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출키로 한 진술서에는 이같은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본 언론들에 의해 크게 보도되면서 이 문제는 국회에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돼 큰 논란을 빚고 있다. 일정부의 이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일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도 가세해 강력히 반발했다.
일 외무성은 결국 진술서에서 이 부분을 삭제,법률적 판단을 내리지 않은채 『핵무기 사용은 절대적인 파괴력·살상력 때문에 국제법의 사상적 기반인 인도주의정신에 합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후퇴했다.
하타 쓰토무(우전자) 총리와 가키자와 고지(시택홍치) 외상이 국회에서 시달리다 못해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일 외무성은 국제법상으로는 합법이라는 종전의 견해를 바꿀 생각이 없다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있다.
일 외무성은 그같은 주장의 근거로 『생화학무기처럼 핵무기사용금지 조약이 없는 이상 핵무기사용이 국제법 위반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이고 진짜 이유는 『일본의 핵억지력과 관련,미일안보조약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핵무기 사용을 위법이라고 말할 경우 일본의 안전보장에 대한 전제가 무너진다』는 점에 있다.
사실 일정부는 60년대부터 미일 안보조약 등을 감안,핵무기 사용이 국제법상 위법이 아니라는 견해를 공식·비공식 국제회의에서 동맹국들에 밝혀왔었다.
그러나 이제 냉전종결로 러시아가 미·영을 향한 핵무기 조준을 해제하고 미·러가 전략 핵무기 해제에 착수하는 등 시대가 크게 바뀌었다.
더구나 지금은 북한 핵문제가 최대의 이슈가 되고 있는 시점이다. 『북한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경우 국제법 위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라는 야당의 힐난에 가키자와 외상은 유구무언이었다.
이러한 시점에 일 외무성이 종래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핵무기사용을 정당화한 것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 일본의 외교가 국민감정을 무시한채 효율성과 국익을 무기로 한 외교관들의 주도로 이뤄져왔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일정부의 저의를 의심케 하는 것이다. 세계 최초의 피폭국으로 국민들이 핵에 대해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핵실험 전면금지나 핵사용금지협정 체결 주장대신 핵무기 사용을 합법화하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이치에 어긋난다.
일 외무성이 유사시 핵을 보유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해두기 위해 이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기를 믿고 싶다.<동경=이석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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