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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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승규가 지선이 이야길 하는데 나는 잠깐 하영이를 떠올렸다.
정화는 상원이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것같)았지만 상원이의 정화를 향한 일편단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나는 상원이의 그 점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이다.승규는 지선이를 좋아하지는않았지만 지선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좋아 하면서 즐기는편이었다.나는 승규의 그 점을 미워한다.
어쨌거나 나하고 하영이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1학년 한햇동안 꾸준히 하영이를 좋아했다.다른 녀석들은 내가 얼마나 하영이를 좋아했는지 잘은 모른다.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깊이깊이 묻어두고 있어야 날아가버리지 않는 거라고 나는 막연하지만 그렇게 믿고 있었 으니까. 영석이 큰누나 부부처럼 나도 1년중 2백번 쯤은 그랬다.주하영-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한 이름이었고 눈 뜨면 제일 먼저 생각한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하영인 알 수 없는 계집애였다.
나는 그애가 흐트러진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언제나 단정한 차림새였고 언제나 정돈된 표정이었다.그러니 한번도 나는 진짜 하영이를 본적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그러면서도 하영인 꽉막힌 모범생처럼 보이지도 않았다.실제로는 공부도 잘했지만 어딘가 자기만의 비밀을 잔뜩 감추고 있는 계집애같은 느낌을 주곤 하였다.이게 하영이의 진짜 매력인지도 몰랐다.
하영이가 나를 괜찮게 생각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하영인 원래 공주병 따위에 걸린 유치한 계집애가 아닌데 내게는 어쩌자곤지 마냥 도도하게 굴어서내게 상처를 주고는 하였다.그때 마다의 내 상처 가 얼마나 깊었는지 하영이는 상상도 못할 거였다.우리가 무심코 길을 걸어다니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개미를 밟아 죽이고 있는지를 모르고지내는 것처럼.
가령 체육시간이 끝나고 하영이가 평행봉에 걸어 둔 스웨터를 잊고 교실에 들어갔을 때였다.내가 잽싸게 스웨터를 집어들고 뛰어가 계단을 오르고 있던 하영이를 불러 세웠을 때였다.
『이거 두고 갔던데… 니 꺼 맞지?』 내가 체육시간 내내 자기를 유심히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게 누구 껀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일부러 걸어 두고 온 거지만… 하여간 고마워.』 하영인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하면서 스웨터를 받아들었다.그리곤 돌아서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올랐고 모퉁이를돌아 사라졌다.
나는 원래 계집애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놈이 아니었다.그런데 그 1년동안,난 한 백만번 쯤 하영이에게 다가갔지만 그 대가는매번 절망 뿐이었다.
말한 김에 다 정직하게 말하자면,나는 딱 한번 하영이에게 연애편지 비슷한 걸 준 적도 있었다.내가 당번인 날 빈 교실을 지키면서,며칠 동안 한 백만번 쯤 고쳐 쓴 걸 하영이의 책가방에 넣어 주었다.
난 널 아주 많이 생각해.
잠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그리고 깊은 꿈 속에서도.
그게 1학년 2학기 초였는데, 하영이에겐 아무 변화가 없었다.그래서 난 2학년이 되면서 하영일 잊기로 결심했다.난 그동안너무 힘들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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