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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병제는 정예강군으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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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중세 유럽에선 원칙적으로 모병제였다. 전쟁은 기사계급이 담당하고, 평민은 군대에 가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와 달라졌다. 나폴레옹이 최초로 국민 징병제를 도입해 순식간에 엄청난 숫자의 상비군을 구축한 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군대를 모조리 격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성공은 징병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정말 정예강군이었을까. 후세 사가들은 나폴레옹 군대는 실제론 매우 비효율적이었다고 지적한다. 대군의 대부분인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징집된 젊은이들을 전장에 앞장세워 총알받이를 만들었고, 이런 수적 우세를 통한 일종의 인해전술로 적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즉 쓸데없이 나폴레옹군의 희생자가 많은 전투였다는 것이다. 결국 징병제가 대군을 형성할 순 있지만 그것이 정예강군이 되려면 상당한 기간을 군대에 복무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가 택하고 있는 군 의무 복무 2년제가 과연 정예 전투 능력을 가진 강군을 만드는 데 충분한 시간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모병제인 미국에서 처음 사병으로 지원하면 대체로 계약기간이 8년이다.

필자가 얼마 전 미국 LA공항의 칵테일 바에서 한잔 걸치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미국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미군 해병대 사병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이라크 전투에 이미 세 번이나 파병됐었고, 지금은 휴가 가는 길인데 돌아오면 또 이라크에 투입된다고 했다. 놀란 필자가 “죽는 게 안 무섭느냐”고 했더니 그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괜찮아, 이게 내 직업이야(It’s my profession)”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profession’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잠시 상념에 잠겼다. 이 단어는 그냥 아무 직업에만 쓰는 게 아니고 의사· 변호사 등의 소위 전문직업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일개 사병인 그가 자신의 직업을 바로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전문직업으로 비유했다. 그렇다. 군인은 전문직이다. 훌륭한 전투력은 고도의 훈련과 전문지식 없이 생길 수 없다.

정예강군은 바로 이러한 전문직업인으로 이루어진 군대만이 될 수 있다. 제대 날짜만 입대하자마자 기다리는 사병이 많은 군대가 어떻게 정예강군이 될 수 있을까. 극심한 청년 실업난에 장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 사기업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 신분에 각종 혜택이 많은 군대라면 전문직으로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는 이미 유급 지원병제를 소수나마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전 사병에게 중소기업 정도의 월급과 미군이 누리는 복지혜택을 제공하려면 우리나라의 국부가 더 축적돼야 하는데 대략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수준이면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본다. 군대가 ‘신이 내린 직장’이 될 정도로 최고 인기 직장으로 만드는 것이 선진국 대한민국이 준비해야 할 과제 아닌가.

이욱 한양대 교수 · 정보통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