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성공의길>2.영세업체-자금난.판매부진 2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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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추석이 코앞에 있다보니 도매상.대리점.제조업체 할것없이 모두들 수금하러 다닌다고 난리죠.하지만 서로들 줄것은 안주고 받을 것만 챙기려는 판에 돈이 제대로 돌리가 있나요.』 청계천에서 컨덴서.스위치등 각종 전기자재제품 도매상을 하고 있는 李모씨(43)는 요즘 업계의 상황을 가리켜「수금전쟁」이라고 말한다. 어음할인할데는 없고 곧잘 돈을 빌려주던 친지들도 실명제이후관심도 갖지 않으려드니 월급이라도 주려면 밀린 수금이라도 확실히 하는 길 뿐이라는 것이다.
李씨는 아침출근때 곧바로 일선판매상과 소형대리점을 돌며 수금독촉에 나선다.
사무실에 나가봐야 아침부터 들이닥치는 제조업체 수금사원들에게시달려야 하기 때문.
더욱이 李씨를 대신해 수금해 오던 직원은 지난주말 부도가 난거래업체에 채권단으로 가 있는데 가압류처분이 안난 상태다보니 다른 채권자가 물품을 가져가는 것을 막기위해 그곳에서 한시도 자리를 비울수 없다.
하지만 대리점을 둘러봐야 자신처럼「어음쪼가리」나 들고 발을 굴리고 있을뿐이고 현금이 들어오는 일선 판매상들은 판매량이 준데다 그마저도 서너달전에 그들이 발행한 어음을 결제하기도 바쁜판이다. 李씨는『그들도 부도나게 생겼다는데 현금좀 빨리 융통해달라는 말이 통합니까』고 반문하며『사업한지 10년동안 아무리 어려워도 설날.추석만큼은 빚을 내 직원들에게 보너스라도 쥐어줬는데 올해는 월급지급도 힘들것 같다』고 푸념했다.
제조업도 어렵기는 유통업체들과 마찬가지여서 식품가공기계를 생산하는 우성기계의 경우 실명제이후 갑작스런 운영자금난으로 지난달말 사무직원들의 월급을 10일 늦춰 지급하기도 했다.
金모사장은『받아놓은 어음들이 대부분 중견회사들의 진성어음이기는 하지만 이미 할인한도를 넘어 은행에서 할인도 못하고 있다』며『다행히 다음주부터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이 있어 추석,월말자금결제를 간신히 꺼나갈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金사장은『자금계획이 이처럼 빡빡하다 보니어음발행업체중어느 한군데라도 부도가 나면 그 차액을 바로 메울 길이 없다』고 우려했다.
사채업계역시 실명제충격으로 큰손들은 모두 사라지고 군소사채업자들이나 타이어商처럼 현금위주업종의 업체사장들이 일부 어음할인을 해주고 있기는 하다.하지만 철저한 보안에다 담보를 요구하고이율도 4%(실명제이전 2~2.5%)로 높아져 웬만한 기업들은바라기 힘든 상태다.
이같은 자금난과 더불어 현재 중소.영세업체에서 가장 우려하고있는 것이 판매의 급속한 위축현상이다.
수개월뒤 자신들 업체의 자금사정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무턱대고어음을 발행했다가 부도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고,또 할인도 안되는 어음을 받았다가 만기일 이전에 언제 부실채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현재 업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건자재대리점을 하는 崔모씨는『이달들어 일선소매상에 나가는 판매량이 절반이하로 떨어졌다』며『현금보기도 어려운 판에 모두들 어음을 찍지도,받지도 않고 있으니 재고물량이나 소진시킬뿐 거래가 제대로 이뤄질수 없다』고 말한다.
崔씨는 이때문에 일선에서 주문이 오더라도 재고물량만으로 우선견뎌보고 제조업체에는 당분간 추가주문을 하지 않을 계획이다.
또 실명제로 무자료거래가 불가능해진 것도 판매위축의 큰 원인이다. 자료거래를 통해 실거래전체를 신고할 경우 기존의 신고액보다 두배.세배이상 높아질 것이 뻔한데 이경우 세무서에 변명할말도 없고 차라리 경기도 안좋은 판에 거래규모를 축소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崔씨는『거래규모를 줄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료거래시 부가가치세 10%가 그대로 제품가에 반영되는데 기존의 거래선들이 갑자기 10% 더 비싼 가격에 사려하겠느냐』며『당분간 부가세제가 반영된 새로운 유통질서가 잡힐때까지 거래위축은 불 가피하다』고내다 봤다.
중소기업계에선 바로 이러한 점들을 들어 정부가 수면아래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선 등한시 한채 표면적인 상황만으로 너무 낙관하고 있지 않은가 우려하고 있다.
中小企協중앙회 金政洙조사부장은『정부가 실명제이후에도 부도업체수가 크게 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은행거래를 할수있는 중견기업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일 뿐』이라며『정부의 실명제보완대책에 휴폐업.도산하더라도 당장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십만개 영세제조.유통업체들의 실상이 제대로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李孝浚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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