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명계좌 천여개로 「돈 세탁」/국세청이 밝힌 카지노 비리백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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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입출금 반복… 지분도 위장분산/자금흐름 안파헤쳐 의혹 여전
지난 6월9일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시작된 서울워커힐 카지노 등 3개 카지노 업소에 대한 특별세무조사가 2개월반만인 27일 마무리됐다.
이로써 그동안 「사회비리의 온상」이자 「마지막 세정치외법권지대」 등으로통했던 카지노업소에 대한 세간의 의혹이 부분적으로 나마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이번 세무조사 결과는 카지노업소의 탈세외에 정작 국민적 관심사였던 정­재계·폭력집단 등과의 연계여부나 실제 지분소유자의 실체,그리고 외환유출 등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내지 못해 서둘러 종결했다는 지적이 일부 나오고 있다. 국세청 발표에 따르면 3개 업소는 예상대로 복잡한 돈세탁 과정을 통해 수입금을 빼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워커힐카지노 7백14개,파라다이스 비치 카지노 3백19개,오림포스 카지노 1백13개 등 무려 1천1백46개의 가명계좌를 동원,장부에서 누락시킨 수입금을 쪼개 입금­인출­재입금 등을 반복하면서 빼돌렸다. 이중 상당수 계좌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한두번 쓰고 바로 폐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전경원씨와 유화열 오림포스관광산업 회장은 자신의 소유지분을 친인척이나 임직원 명의로 위장분산했고 증자자금을 이들 위장지분 소유자들의 자금으로 불입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런 복잡한 자금흐름이 조사망에 포착될 수 있었던 것은 가명계좌에 회사의 영문 이니셜를 표기해놓았고 입금된 수표에도 같은 표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국세청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업소에 상당한 액수를 추징했고 전씨 등 사주에 대해서도 무거운 세금을 물렸지만 전체적으로 볼때 조사의 한계를 좁혀놓고 진행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국세청은 당초 조사에 착수하면서 조세시효인 최근 5년간의 모든 탈루세금을 추징할 것임을 내비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90∼92년 3년간의 탈세만 다루었다. 88,89년의 장부를 거의 입수하지 모시했다는 이유에서다.
또 카지노업소에서 빼돌린 자금이 상당부분 다른 계열사,예컨대 전씨의 경우라면 그가 운영하는 건설·금융회사 등에 흘러갔을 것이 뻔한데 조사가 이 부분으로 확대된 기미가 거의 없는 것도 의문으로 남는다.
자금 해외유출 부분도 마찬가지다. 카지노업소는 국내에서 고객에서 칩을 준후 나중에 해외에서 노름빛을 받는 수법으로 외화를 공공연하게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국세청은 해외사무소의 장부를 조사한 결과 전혀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국세청은 특히 실제지분소유자나 비호세력 여부,정치권으로의 자금유입 등도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카지노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이라는 정덕진씨의 슬롯모신업소 수사에서도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이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에 비추어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사종결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국세청이 막판에 매우 서둘렀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국세청은 이번조사를 조사일수 기준으로 2개월간 진행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달초 조사시한이 다가오자 조사미진을 이유로 기한을 10월까지 2개월 연장하는 한편 처음에는 3개반(각반 10명)이었던 조사인력을 7개반으로 늘렸다. 그러나 지난 17일께 갑자기 조사를 조세범 처벌을 목표로 하는 세무사찰로 전환하고 피치를 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카지노 업소의 배후나 자금흐름을 깊이 파면 팔수록 「뜨거운 감자」가 되기 십상이라는 판단에 따라 탈세에만 초점을 맞춰 구색을 갖추는 선에서 처리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같은 정황 때문이다.<이재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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