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 요소 빼먹은 오락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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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80년대 후반부터 뚜렷해진 새로운 젊은 인력들의 충무로 진출은 침체와 무기력에 빠진 한국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미국 영화 직배를 비롯한 수많은 외부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전 근대적인 제작 관행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충무로의 완고함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던 영화팬들은 동시대 한국인의 삶을 정직하게 그린 영화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나선 이 젊은 영화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들의 작업은 그간 우리에게 몇번의 기쁨과 또 그만큼의 좌절을 안겨주었다. 물론 이 젊은 영화 작가들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직 성급하며 적어도 상당한 기간 동안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아시아에서도 하위의 수준을 달리던 한국영화 문화가 한 두 사람의 천재에 의해 역사적 도약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씨네」의 신작인 『백한번째 프로포즈』는 말하자면 우리를 실망시키는 젊은 영화의 전형적인 예가 될만하다.
39세나 되는 노총각과 어여쁜 첼리스트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사랑 행각을 그린 이 영화는 불행하게도 그것이 상업영화이자 오락영화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별로 관객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영화는 그것이 비록 흥행적인 고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관객에게 자극을 줄 요소를 갖추지 못하면 안 된다. 영화가 너무 예상을 그대로 답습해 나갈 때 대부분의 관객들은 지루해진다. 신인감독인 오석근은 단 한 장면에서도 관객의 의표를 찌르지 못한다.
영화는 구영섭의 상사가 연적이 된다는 등의 소도구를 배치해 극적 긴장감을 높이려 했으나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예정된 결말을 향해 영화는 무감각하게 달려나가고 관객은 어리둥절하게 극장을 나선다. 영하를 보고 난 우리들에게 떠오르는 의문은 이렇다. 과연 이 정도의 소재를 위해 일본에 원작료까지 지불해야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 동안 매끄러운 오락영화를 만든다는「신씨네」의 노력은 그것이 젊은 영화인들의 일종의「원시적 자본축적」으로 이해해 줄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화가 이번처럼 매끄럽기는커녕 어리숙하게까지 보일 때엔 정말 허탈해진다. 영화의 맨 앞을 장식하는「세상과 사람이 바로 담긴 영화를 만드는 곳 신씨네」라는 표어가 영하를 보고 난 관객에겐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까.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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