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달라진 대통령 경고친서/김진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박정희대통령은 몸으로 근검절약을 실천한 지도자였다. 아무도 보지않는 거실의 변기물통에 벽돌 한장을 넣어 물을 아꼈다. 전속 이발사 박수웅씨는 대통령의 러닝셔츠에 뚫린 구멍을 보고 몰래 눈물 흘린 적도 있다.
박 대통령은 70년초 일부 국회의원·재벌기업인·고위관리가 호화주택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사정반에 그집들을 사진찍어 보고하도록 했다. 박 대통령은 사진첩을 훑어본뒤 김정렴비서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집,이집은 안되겠어요. 자기 돈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말이 됩니까. 근로자와 국민은 고생하고 있는데…. 더구나 지도층인사들이 그래선 안되죠.』
박 대통령은 조치토록 명을 내렸다. 김 실장은 지목받은 기업인들을 한사람씩 청와대 본관2층으로 불렀다. 그들의 항변은 여러가지였다. 『손톱만큼도 법을 어긴 적이 없어요』『내가 고생하며 번 돈으로 지은 건데』 등등.
김 실장은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지금 당신이 앉아있는 2층이 바로 대통령집입니다. 그나마 영부인 집무실·비서실장실·부속실을 빼고나면 겨우 침실하고 자녀방·서재·거실뿐입니다. 당신이 기업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나라가 도와줘 성공한 것 아닙니까.』 문제의 기업인들은 대개 돌아가서 집을 처분했다고 한다.
국회의원·고위관리들은 민정수석비서관을 통해 박 대통령의 「경고친서」를 받았다. 받는 순간 얼굴이 새파래졌던 것은 물론이다. 수개월동안 「발송된」 경고친서는 모두 20여통,편지를 받았던 의원들은 71년 총선(8대)때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런 사정작업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93년 봄 한국사회를 강타한 재산공개파문은 31일로 일단 마무리된 것 같다. 그 회오리속에서 몇몇 지도층 거물이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퇴장했다. 그들은 대통령과 여론을 원망하면서 떠났다. 누구는 「토사구팽」이라고 소리쳤다. 겨우 퇴장을 면한 의원·고위관리 20여명은 공개·비공개로 대통령,또는 총리의 경고친서를 받았다. 박 대통령이 썼던 편지가 20여년만에 다시 등장한 셈이다.
「93년 3월31일」이 경고친서의 마지막 배달일자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