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시음기-‘다 카포 2000’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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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29면

지난해 말인가 올 초에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귀가 쫑긋했을 재미난 소식이 전해졌다. 이 지면에서도 소개했지만 지금 세계 와인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로 손꼽히는 로버트 파커가 와인을 레이팅하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100Point도 아닌 100+Point를 준 와인이 탄생했다는 얘기였다. 그가 좋아하는 와인 중 하나인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 중 하나라는 설명이다. 그때는 워낙 구하기가 힘들어 맛보지 못했다.

얼마 전 프랑스에 머물던 아는 이가 구해 주어서 탄생 빈티지인 1998년과 바로 ‘제3사도’인 ‘2000 빈티지’, 그리고 화제가 되었던 ‘2003 빈티지’를 한자리에서 테이스팅할 수 있었다. 와인의 최고 컨디션 유지를 위해 약 3개월 정도 안정화를 거친 뒤 테이스팅에 들어갔다. 오늘은 바로 ‘2000 빈티지’, 즉 ‘제3사도’에 대해 써볼까 한다.
도멘 페고는 17세기 올리브와 체리 상인으로 이름을 날린 가문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이용해 와인을 만든다. 현재 이 지역에서도 자연환경을 잘 살린 와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여러 가지 라인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데 그중 ‘다 카포’는 가장 비싼 와인이다.

짙은 루비 색깔이 눈을 사로잡지만, 매우 어리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약 세 시간의 디캔터 브리딩 뒤 시음에 들어갔다. 각종 꽃향기와 진한 초콜릿 냄새, 스파이시한 향이 거의 코를 마비시킬 지경이다. 강하고 풍부하며 매력적이기까지 한 향기들. 매우 강력한 자극을 풍긴다. 힘있는 떫은 맛이 지배적이면서도 물 흐르듯 따라오는 애시디티와 강한 임팩트를 동반한 마무리 맛이 잘 어우러져 있다.
특이한 건 시간이 갈수록 제법 빠르게 변해 가며 자신을 펼쳐 보이는 와인의 향취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하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보여줄 건 확실히 보여 주는 와인이랄까. 화려한 노즈보다 풍부한 팔래트가 인상적이었다. 왜 로버트 파커가 만점을 줬는지 알겠다. 전형적인 ‘파커 스타일’의 강한 풍미가 인상적인 와인이다. 매우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와인인 것이다.
최소한 2015년은 지나야 마시기 좋은 시기에 들며 앞으로 30년은 거뜬히 더 즐길 수 있는 와인인 듯하다. 궁합이 잘 맞는 음식으로는 두툼한 스테이크나 달팽이 요리를 추천한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달콤한 타닌의 그 맛이 입가에 새록새록 느껴진다.
이준혁(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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