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산 입에 거미줄을 치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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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명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다.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참 멋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유럽에서 공부하다 뉴욕으로 돌아온 때가 하필 대공황 시절이라 일자리도 못 구하고 무일푼으로 살았던 모양이다. 그때 그는 프로베니우스에 홀딱 빠져 이 사람의 책을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고가(高價)의 책들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서적상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서적상은 나중에 일자리를 구하거든 책값을 갚으라는 편지와 함께 읽고 싶던 책을 모조리 보내주었다고 한다.

*** 기성 사회는 집단적 정신질환

캠벨은 뉴욕의 가난한 청년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수도도 설치돼 있지 않아 우물물을 퍼 사용하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지만 이곳에서 기본적인 독서와 공부를 거의 다 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리고 4년이 지나서야 책값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일년을 되돌아보게 되는 이 시점에서 이 구절이 자꾸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격(格)이 높은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는 이제는 지난 시대의 신화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왔던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머리에 저절로 떠오르는 말은 '천박함'이다. 요즘 신문을 보라. 지면의 거의 전체가 부정하게 돈을 주고받다가 검찰에 끌려가는 사람들 이야기뿐이다. 지난 대선 때 대통령 후보 측에게 돈을 퍼붓듯 주어야 했던 기업가들, 거액을 횡령한 공무원들, 각종 청탁을 미끼로 뇌물을 받은 무슨 무슨 협회 사람들…. 아무리 부패가 심해도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엊그제는 두 자녀에게 신경안정제를 먹인 후 한강에 던져 죽인 남자 이야기가 충격을 주었다. 이 사람이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나에게는 우리 사회 전체가 일종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그래서 이 사람이 그 병의 증세로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기성 사회 집단이 이렇게 비정상적일 만큼 부패하고 조야하게 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미래의 주인인 젊은 세대 역시 그 비슷한 길을 따라간다는 데 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대학가 풍경일 것이다. 웬만한 대학교 앞의 거리는 이제 대학가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술집과 카페가 많이 들어섰다. 대학이라는 곳이 원래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라 그 주변에 맥주집과 카페가 들어서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경우는 정도가 심하다. 모르긴 몰라도 술집 대 책가게의 비율이 1백 대 1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대학가가 아니라 환락가인 셈이다.

학생들은 정신없이 놀다가 정신 차리면 그 다음에는 곧바로 고시에 달려든다. 요즘같이 청년 실업자 문제가 심각한 때에 자기 앞날 걱정하는 것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할 일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서글픈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학생들은 자기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해보겠다는 주체적인 욕구, 자신의 지성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려는 의지를 스스로 내팽개친 것일까.

*** 우리의 장점 역동성을 살려야

몇해 전엔가 한 학생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긴 한데 장래가 불투명해 망설여진다는 말을 했다. 내가 해주었던 대답은 "우리 대학원의 철학은 '산 입에 거미줄 치랴'다. 설마 굶어죽지는 않을 테니 한번 공부해 봐라"였다. 약간은 참혹한 이 유머에 한바탕 웃고 대학원에 들어온 그 학생이 이제 학위를 마치고 졸업한다. 이제는 이런 학생들이 슬슬 사라져 가는 형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자랑해 왔던 역동성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현재 우리는 돈 다 떨어진 졸부(猝富)처럼 몸도 정신도 가난한 겨울을 맞고 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성이 겸비된 역동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