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이 공항을 빠져나올 때의 풍경을 텔레비전은 반복해서 보여준다. 흥분의 자락이 남아 있지만 나라를 빛낸 이 전문직 여성은 애써 담담했고 물론 당당했다. 출국할 때는 일행의 멤버였지만 이제 그녀는 칸이 인정하는 '리멤버(remember)'가 된 것이다.
스스로는 기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전문가들은 결실이라고 말한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결실을 보는 건 자연의 법칙이다. 천부적인 기질에 안목과 집념, 거기에 노련한 농부의 손길이 더해졌으니 햇살(광합성)만 받쳐준다면 튼실한 열매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언제부턴가 상을 받은 기억보다 상을 준 이력이 더 쌓이는 게 부담스럽다. 상을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상 받을 만한 사람을 가려내는 일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마라톤대회에는 별도의 심사위원이 없다. 열심히 뛴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첫 번째로 골인한 사람에게 메달을 걸어주면 되기 때문이다. 대중예술 분야는 다르다. 누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의 물꼬를 트느냐가 중요한 기준인데 그 마음의 행방을 들여다볼 재간이 부족하니 어려움이 큰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제에 나타나는 배우들은 크게 보아 두 부류다. 상 주는 배우와 상 받는 배우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고 미리 객석에 앉는 배우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후보로 등재돼도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는 배우가 훨씬 많다. 수상통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있어도 자긍심은 없기 때문일까. 하기야 배우들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상의 권위가 없거나 미흡한 게 실은 주된 이유다. 전도연이 칸영화제에 간 건 종려나무의 확답을 받고 간 게 아닐 것이다. 후보로만 거론돼도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유명 배우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권위는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실력과 존중, 공평에서 비롯된다. 한국 사회에 권위가 실종된 건 상 받을 사람과 벌 받을 사람을 제때에 제대로 가리지 않는 탓도 있다.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보면 '그때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벌은 그때 바로 주고 상은 좀 나중에 주어도 괜찮을 듯싶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예전에 드라마를 찍으며 원로배우로부터 '전도연 네가 배우냐, 앵무새지'라는 야단을 맞은 게 분발의 계기가 됐다는 고백이 나온다. 그때 반발심에서 앵무새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관객은 오랜 기간 새장에 갇힌 그녀를 측은한 눈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유럽의 하늘을 비상하는 큰 새가 된 건 제때 벌 받고 반성한 덕분이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