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사랑' 반세기 삶, 우리 가락에 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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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국을 대표하는 국악인 황병기(71.이화여대 명예교수.사진)씨가 13년 만에 앨범을 낸다. 다음달 초 발매된다. 24일 서울 북아현동의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70세 즈음에 만든 작품들이 공자님의 말씀인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라는 말에 저절로 들어맞더라"며 이 작품집을 소개했다. 마음먹은대로 작곡한 음악들이 음악적 문법에 어긋나지 않더라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이번 앨범 '달하노피곰'은 반세기 동안 가야금을 다뤄온 그의 삶을 시대별로 담고 있다. 가야금 연주곡 '시계탑'은 1999년 암 수술을 받았을 당시 서울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 병원의 시계탑을 보고 작곡했단다. 한밤중 팔에 링거를 꼽은 채 산책을 나왔던 황씨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역설적으로 제일 아름다운 가락이 떠올랐다"고 기억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소녀 취향의''행복한' 음악이 나왔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타나를 연상케 하는 불빛이 춤추듯 음표들이 작렬하는 음악"이라고도 표현했다.

황씨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가야금을 처음 접했다. 부산 피난 시절 우연히 들은 가야금 소리에 반한 경기고등학교 학생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이후에도 매일 국립국악원을 드나들었다. 대학 2학년 때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은 후 가야금과 평생을 함께 했다.

이번 앨범에 포함된 8개곡 중의 한 곡인 '낙도음(樂道吟.도를 즐기는 사람의 읊조림)'은 "70세가 넘으면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공자님 말씀처럼 자유롭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곡을 연주하려면 음역을 뛰어넘으며 어려운 테크닉을 구사해야 한단다. "노인이 술에 잔뜩 취해 춤을 추는 모양의 곡"이라는 그의 설명처럼 종잡을 수는 없어 보이지만 흥에 겨운 음악이다.

그의 나이는 70세를 넘었지만 실험 정신만은 아직 청년이다. 대금 연주곡 '자시(子時)'에서는 혀와 입술을 떨면서, 혹은 목소리를 섞어서 부는 연주법을 주문했다. 트럼펫 연주에 쓰이는 주법을 활용해 묘한 음색이 나오도록 작곡한 것이다. 노래곡도 세 곡이 포함됐다. 1962년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 곡을 붙인 이후 처음이다. 서정주 시인의 '추천사', 박목월 시인의 '고향의 달'을 가지고 만든 곡들에 황씨는 특별히 애착이 간다고 소개했다.

황씨는 이달 말부터 미국에서 네차례 연주회를 연다.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한국관 개관 기념 연주에 초청된 것이 계기다.

그는 "내년에 모스크바에서의 연주도 계획돼 있다"며 "외국인들과 우리 악기로 소통하는 경험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황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59년 서울대 국악과에서 가야금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이화여대 음대, 미국 하버드대 등 국내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악에 작곡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63년 첫 창작곡 '숲'을 발표해 창작국악이란 새 장르를 만들기도 했다. 다섯 살 많은 부인 한말숙(76.소설가)씨에게 아직도 '자기'라고 부른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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