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장은 개혁대상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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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 전 시장을 개혁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안)이란 이름으로 발표됐다. 재벌그룹의 계열사 간 순환출자 때문에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출자총액 규제를 계속해야 하겠다고 한다. 소유지배 괴리도나 의결권 승수와 같이 세계적으로 생소한 정책 신발명품이 동원되고 있어 시장개혁에 대한 정부의 의욕이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시장은 실험실에서 실험하듯 재단해서는 안 된다. 시장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를 둘러봐도 기업지배구조는 각양각색이다. 미국 포드자동차의 대주주는 의결권이 10배인 주식을 보유해 7%의 지분만으로 총 40%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이런 사정은 유럽 기업들도 비슷하다. 1주 1의결권의 원칙을 당연시하는 우리와 달리 대부분의 나라는 기업의 의사결정 방식을 법 대신 시장과 기업의 자율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순환출자 문제도 그렇다. 독일의 알리안츠생명은 뮌헨 재보험과 주식의 15% 정도를 상호 출자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미쓰이나 미쓰비시그룹의 경우처럼 상호 출자가 일반적이다. 상호 출자를 금지하는 우리 정부의 잣대로 보면 문제가 많은 기업들일 테지만 일본의 제조업은 아직도 세계 최강을 자랑하고 있다.

이번 로드맵은 순환출자나 소유지배 괴리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기업의 실적과 시장의 평가다. 시장의 판단과 정부의 인식 간에 정책 괴리도가 발생하진 않는지 따져볼 일이다. 로드맵의 기준에 의하면 파이낸셜 타임스가 좋은 기업 42위로 평가한 우리나라 최우량 기업이 재벌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장의 평가와 달리 문제기업으로 분류되고, 계열사 출자가 없는 코스닥 벤처기업은 경영자 비리가 많아도 기업지배구조가 좋게 나온다. 우리는 재벌시스템 자체를 문제삼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기업의 현금흐름(cash flow)에 문제가 없는지, 경영권 남용은 없는지 등 기업지배구조 본연의 가치에 관심을 둔다.

순환출자는 역기능이 부각돼 그렇지 순기능도 많다. 자본시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절 자동차나 반도체 같은 신산업에 진출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M&A 위협의 안전판 역할을 해 기업들이 기술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최근 외국계 펀드의 공격으로 SK가 기업 경영에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대부분의 우량기업도 외국계 대주주가 국내 대주주보다 더 많은 지분을 매집해 놓고 있어 경영권 안정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정부정책을 따라 계열사 지분을 처분하면 수십년간 공들인 기업을 당장 잃게 될 터다. 기업들이 정부정책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번 로드맵의 목표가 소유지배 괴리도라는 개념을 들어 기업집단을 비난하고 출자 규제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것이라면 적절치 못하다.

기업지배구조 개선문제는 정책보다 시장의 힘과 기업의 자세에 달려 있다. 그런데 IMF사태 이후 기업경영을 감시하는 수많은 제도.장치가 도입되면서 채권금융기관과 외국인 투자자.시민단체 등 시장참여자들이 기업을 보는 감시의 눈초리도 매서워졌다. 기업들도 이제는 시장으로부터의 신뢰가 생존요건임을 잘 알고 있으며 주주 중시 경영과 윤리경영을 실천하는 기업들이 부쩍 늘고 있다.

그동안 시장은 충분히 변했다. 이제는 정부가 달라져야 할 때다. 벌써 수십년째 정부 개입이 시장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정부가 시장개혁을 명분삼아 기업활동 규제를 계속하려 한다면 기업은 보다 자유로운 곳을 찾아 시장을 떠나게 돼 결국 게도 구럭도 다 놓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경제의 당면 과제는 기업의 투자활동이 다시 왕성하게 살아나는 일이다. 소유지배 괴리도라는 불분명한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기업의 투자가 희생돼서는 곤란하다. 정부에서는 출자총액 규제를 풀어주고 기업들은 시장과 국가 경제의 기대에 부응해 나가는 방향으로 시장경제 로드맵이 다시 짜이기를 바란다.

김효성 대한商議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