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4) 경성야화(39) 경성제국대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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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행렬에 감격한 며칠 뒤인 1927년 4월, 나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총독부에서 세운 관립대학으로 조선에 와있는 일본인들의 자제를 주로 하고 명색만의 조선인 학생을 곁들여 뽑았다. 명색이란 말은 1년에 뽑는 신입생총수(1백60명)의 4분의1인 40명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입학한 문과 B반은 모두 40명으로 조선인 학생은 9명이었다.
정성제국대학은 원래 총독부가 세우고 싶어서 세운 것이 아니었다.
1920년 한규설·이상재를 발기인으로 한 조선교육회가 발족하였고 l922년에는 이상재·이승당·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발족돼 조선인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겠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대학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지방부호들은 이에 호응해 왔으므로 총독부에서는 이를 묵과할 수 없게되었다. 민립대학이 설립되면 이것이 독립운동의 근원지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민립대학의 모금운동을 중지시키고 그대신 관립인 제국대학을 세우기로 하였다. 명목상으로는 조선에 대학을 세워서 조선인학생을 가르친다고 선전해놓고 실상인즉, 일본인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그들의 대학을 세운 것이다. 1924년5월에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문을 열었다.
원래 동경·경도·선대·구주에있는 제국대학들은 일본 각지에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입학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되어있지만 예과는 아무 시험 없이 그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문과 A와 E, 그리고 이과로 돼있었다. 문과 A는 학부에 올라가서 법문학부 법학과가 되고 문과 B는 법문학부로 올라가서 철학과·사학과·문학과로 갈리게 되는데, 철학과는 다시 세분돼 서양철학전공·동양철학전공·윤리학전공·미학전공으로 되었다. 사학과는 서양사학전공·동양사학전공·조선사학전공으로 세분되었고, 문학과는 일본문학전공·조선문학전공·영문학전공으로 갈라졌다. 내 경우를 든다면 문과 B에서 예과를 마치고, 학부에 올라가 법문학부 문학과 안의 영문학전공으로 되었다.
이과는 학부에 올라가 모두 의학부학생이 된다.
1927년 4월10일, 문과 B의 40명은 본관 2층 오른쪽 두번째방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교는 청량리에 있었다. 노송이 우거진 언덕아래 넓은 운동장이 있고 그 왼쪽으로 붉은 3층 벽돌집이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일본인 학생과의 관계다. 조선인학생들은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으므로, 모든 일이 일본인 학생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학생회의 모든 임원자리도 거의 일본인 학생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우리반의 경우 일본인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모이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도 곁으로는 우리들을 멸시한다든지, 도외시하는 일은 없었다. 의논할 일은 서로 의논하고 학기마다 두번씩 열리는 클래스회에서도 술을 마시고 떠들었지만 의견충돌이나 싸움은 없었다. 학기초와 학기말에는 담임선생한테 10원을 타고 우리들이 1원씩 회비를 내 50원을 가지고 동해누라는 지금의 중앙우체국 뒤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데 한번도 싸움을 한 일이 없었다. 우리가 재학중에는 다른반에서도 싸움을 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다만 조선인 학생들끼리만 문우회를 조직해 한학기에 한 두 번 모였고 1년에 몇번 등산회를 하기도 하였다. 기관지 『문우』를 1년에 한번 발간하는 것 외에 조선인 학생끼리의 두드러진 행동은 없었다.
조선인학생의 친목기관인 문우회는 학교측의 아무런 간섭없이 학교 뒷산이나 중국요리집에서 모였고 도봉산으로 단풍놀이도 갔었다. 그러나 잡지 『문우』는 1928년에 학교당국의 제지로 제6호의 원고를 모았다가 내지 못하고 문우회도 해산되었다. 학교당국은 상부의 지시라고만 설명할 뿐 그 이상은 일절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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