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군』저자 이태씨|"빨치산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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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현상의 남로당 무력부대「남부군」의 궤멸기를 그린 기록 소설『남부군』이 출간된 것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엄존하던 88년 여름이었다.
빨치산 출신이 스스로 쓴 이 책에는 역사의 현장에 내팽개쳐져 찢기어진 인간의 잔해가 널려있었다.
독자들은 금기의 공간 저쪽에서 갑자기 다가온 빨치산의 세계에 접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책은 당연히 불티나게 팔렸다.
이태라는 필자는 가명이었으며 매스컴의 추적 끝에 밝혀진 그는 놀랍게도 국회의원을 지낸 당시 민주산악회 산악대장인 이우태씨(68)였다.
사람들은 한 개인의 기구한 파란을 보며 이 땅의 분단역사의 굴곡을 생각했었다.
『일부러 가명을 썼지요. 현역 정당인이어서 스스로를 밝힐 입장이 아니었고, 또 이북출신 인사나 반공전선에서 희생돼간 가족들의 심정도 떠올라서 그랬습니다. 어쨌든「남부군」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습니다.』
수치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랑은 더욱 아닌 빨찌산에 관한 경험과 보관 기록을 토대로 역사에 매몰됐던 한 공간을 복원하는데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농담 삼아 말하는 변화 중에는 경제적인 것도 있다.「남부군」의 인세로 돈 좀 벌었지요. 정당인이란게 어찌 보면 백수 아닙니까. 그 돈으로 빚도 좀 갚고 두 자식에겐 경제적으로는 처음 애비 노릇했습니다.』그리고 그는 스스로 본명이 우태 밑의 괄호 속에 이태라고 박은 명함을 지니고 다니며 빨치산 기록작가 일에 열중하고있다.
물론 민주산악회 중대장이라든지, 민자당정책평가위원으로서의 이름은 이우태다.
지난해 그는「남부군」의 지휘자였던 이현상의 궤적을 따라간 실록『이현상』을 펴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지난해 틈틈이『남부군』집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으로 지리산 일대를 누볐다.
요즘에는 소실집필에 골몰하고 있다. 물론 빨치산의 산 생활과 관련된 소재가 내용이다. 『못다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기록문학으로 하기에는 좀 곤란한 이야기, 이를테면 산중에서의 남녀간 애정이라든가, 전향·귀순·죽음 등에 직면한 인간적인 갈등 등은「남부군」식으론 도저히 전달할 수가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픽션이 가능한 소설형식을 빌려「남부군」을 연장하려는 시도지요.』
그는 현재 단편 4∼5편 정도를 써놓고 원고를 다듬고 있다.
지리산 세석평전에 있는 책이름에서 제목을 땄다는『음양수』는 전투와 기아와 도피의 와중에서도 어쩔 수 없이 피어나는 남녀간의 애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낙오자』라는 단편은 전향을 둘러싼 동료간의 갈등을 통해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의 고뇌를 그리려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 단편들을 역시 빨치산 출신 시인인 김영씨가 쓰고 있는 단편들과 묶어 빠르면 해 중에 단행본으로 퍼낼 계획이다.
『남부군』에도 나오는 김영씨는 이씨의 책이 계기가 돼 이씨와 40년만에 해후, 요즘은 한 달에 한 두 번씩 만나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산에 관한 수상집을 펴내는 것도 올해 이씨의 계획 중 하나다.
빨치산과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20여년 계속해온 산행 길의 소감과 10년째 이끌고 있는 민주산악회 등반기를 함께 묶어보자는 것이다.
『남부군』은 출간 직후엔 운동권으로부터 큰 관심을 모았으나 곧「나약한 회의주의자의도피·투항기록」이라고 매도당하며 대학가에서 읽으면 안 될 금서로 찍혔었다.
『공산주의의 맹점은 인간의 심성을 수학공식 보듯이 규정화 하는데 있습니다. 휴머니즘을 배제한 체제라는 게 가능합니까.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출발부터 실패를 예비한 체제지요. 요즘 운동권들은 그 점을 빨리 자각해야합니다. 더구나 공산주의도, 뭣도 아닌 왕조라고나 해야 할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러면서 그는 최근 어느 잡지에 게재된「박헌영은 미국 간첩이었다」따위의 기사가 얼마나 무책임하냐고 했다.
따라서『남부군』은 이데올로기를 앞장서 떠맡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해원의 기록이며, 나아가 자신이 합일이 있다면 적어도 빨치산에 관해서는 남북 양측의 오류를 고쳐 가는데 도움이 되는 작업이라고 했다.
지난해『남부군』은 영화로 만들어져 전국에서 1백만 명 이상이 관람해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제작비를 댄 사람들은 원작자인 이씨나 영화를 감독한 정지영씨에게 계약된(약간의 손해나 이익을 가정해 책정) 고료나 연출료 외엔 준 것이 없다.
『누구든 빨치산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선 안됩니다.』
이씨는 지지난주『내가 즐겨 찾는 곳』이란 기획물의 사진촬영을 겸해 지리산을 다녀왔고 다음 다음주엔 부인 조인제씨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아는 사람이 콘도 이용권을 빌려줘 남원쪽 지리산에 다녀올 계획이다.
지리산은 이씨에게 운명적으로 닿아있는 것일까. <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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