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였던가 축제였던가/조두영(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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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의젓한 중년이 되었으면 남들처럼 운동으로 몸을 푼 뒤 맥주 두어잔에 벙글거리며 집에 들어서야 할터인데 그렇지 못한 부류가 있다. 구멍가게 소주집에서 시국비판의 판을 벌여 유명인사 몇사람을 돌아가며 씹는 입운동만 하고도 멀쩡한 간을 가지고 흐뭇해 돌아오는 가장이 바로 그들이다. 돈 유무에서가 아니라 통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피차 그런 식으로 개발해왔기에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외대사건,광역선거,여름방학으로 거리가 조용해진 요틈을 타 일부 저학년 대학생들이 왜 그리 쉽게 데모와 가투에 휘말리는가를 오늘 한번 정치 사회면을 떠난 심리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세가지 심리적 갈등
사춘기 청소년은 그 특성상 다음 세가지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음을 정신과의사로서 늘 보고 있다. 즉 그 첫째,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심정과 의존하고 싶은 심정간의 갈등이 있다.
그래서 부모가 간섭하면 어른취급해달라 덤비고 알아서 소신껏 하라하면 너무 무관심·무책임하다고 투정부리기 때문에 입싸움에서는 부모가 항상 패자가 된다. 둘째,남들처럼 되려는 심정과 또 반대로 독특한 주체성을 세우려는 심정사이의 갈등이다. 그래서 이들은 용모·사고방식등에서 남들과 나는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해 「동참」이라는 말에 끌리며,반대로 자신을 유별난 존재로 자타에게 부각시키려 안간힘을 쓴다.
셋째는 거세어진 본능적욕구 충족의 소망과 추상같은 양심사이에 낀 갈등이다. 폭포수처럼 몸안에서 쏟아지는 호르몬은 이들에게 우람한 근육을 삽시간에 선사하기때문에 이들은 육체를 용틀임시켜 공격욕구와 성적욕구가 쌓여 생긴 긴장을 풀려하지만 만약 그랬다간 곧바로 신세망친다는 심한 불안감이 따른다.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억제할 목적으로 양심을 크게 키운다. 즉 본능적 욕구와 양심의 두 극대세력이 마음속에 자리잡고,이를 중재할 자아는 쪼그라져 맥못추는 상황이 되다.
그러니 욕구충족의 길로 나서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양심의 노선만 취하자니 본능이 운다. 결국 본능과 양심 두쪽 모두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행동을 찾아내 스트레스를 풀 수 밖에 없다. 학교나 고장의 명예를 걸었다며 하는 운동시합에서의 집단응원과 뒤이은 편싸움,그리고 술자리 고담준론이 젓가락으로 상을 두들겨 패는 유행가 가락으로 이어지던 것이 지금 중년들의 한세대전 모습이었다. 요즈음도 산에 가보라. 호젓한 숲속에 앳된 청소년 남녀가 바짝 붙어앉아 주책없이 호기심이 발동한 어른등산객의 허를 찌르듯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이런 청소년들도 나이가 들고 인생경험을 하면서 갈등을 수습하게 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심리상황을 맞는다. 즉 어린시절 좋았던 때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과거와 미래를 참작해 현실에 맞는 인생설계를 해야겠다는 것,인생에서 영원히 꿈을 상실했다는 것,그리고 나만 아닌 남과도 가까이 지내면서 사랑을 나누겠다는 것 같은 심경변화가 마음중추에 자리잡는 경지인데,이것이 바로 청소년기 종료시점이다.
○욕구충족 기회 박탈
청소년기 종료는 보통 17∼19세에 오는데 근래에 와서 고등교육을 받는층 다수에서 지연되는 현상이 범세계적으로 있고,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평균수명연장과 자립가능연령의 상승도 그 이유지만 우리쪽은 특히 입시지옥이 문제다. 중·고교 6년간 그저 공부만을 다그치는 부모·선생의 압제밑에서 욕구충족의 기회를 박탈당한채 살아왔으니,마치 증기구멍을 틀어막은채 끓이는 물주전자같은 상태로서 조만간 주전자는 튈 수 밖에 없다.
이러하니 대학신입생 상당수가 그제서야 청소년기 절정의 심리상황을 맞게되고,그런 일부에게 데모와 가투는 매력적이기만 하다.
동참하니 남과 같아져 좋고,내목소리를 세우니 주체성있는 어른이 된 것이요,구호마다 구구절절 양심에 쏙 들어오고,학교 그늘에 보호받으니 의존심도 만족된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팔을 뻗었다 뺐다하는 동작은 율동에서 오는 상쾌감을 준다.
또 지휘자에 따라하는 동작이기 때문에 어려서 어른따라 쟘쟘,곤지곤지해서 칭찬받던 아스라한 기억을 무의식에서 불러일으킨다. 구호도 전반부는 가볍게 한번이지만 후반부인「타도하자!」는 네번 외치게 되어 있어 무의식적 공격욕구가 충족된다.
본능적 욕구란 물불을 안가리고 그즉시 충족되어야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이에 휩쓸리면 참고 기다리지 못한다. 좋은 예가 투표로써 싸울수 있었던 광역선거에서 보여준 20대의 대량기권이다.
○벽돌 던지는 성인식
성인들이 낸 세금으로 만든 보도블록을 깨 던지고 도망치는가 하면 반대편 역시 세금으로 장만한 최루탄을 쏘고 쫓고 하는,대학생들과 전경들 모습을 보면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야릇한 미소가 나온다.
태고적 원시부족사회에서 빨리 뛰고,멀리 던지고,교묘하게 몸을 숨기고,적을 잡아오고,우레소리를 질러 맹수를 기죽이는 실력을 어른들 앞에서 인정받아야 치를 수 있는 그 성인의식의 마당을 오늘도 여기에서 본다는 재미에서라 할까. 아니면 「녀석들,우리 세금으로 축제를 치르는 구만」이라는 생각때문일까.
데모와 축제­. 이것이 공존하기에 지긋한 중년들이 「참아주면 조만간 투표장에 오겠거니」하면서 지난번 청소년들 5월행사를 지켜봤던 것이다.<서울의대교수·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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