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들기] 39. 영동 아파트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구자춘 시장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주변을 아파트단지로 조성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도시계획과장에게 지시했다.

반포동.잠원동 일대는 한때 사평리(沙坪里)로 불렸던 모래벌판이었다. 모래벌판을 따라 둑을 쌓고 자동차 전용의 강변도로를 신설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땅은 강변도로 아래 저지대에 있었다. 비가 많이 와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 강변도로 양쪽 저지대는 침수되기 일쑤였다. 몇 군데에 유수지를 만들고 배수펌프장을 설치했지만 저지대인 탓에 주택이 들어서지 않았다.

원래 필지당 면적이 넓은 농지였던 영동지구는 구획정리 사업으로 대규모 택지로 탈바꿈했다. 이곳에 투기꾼들이 몰리면서 필지당 1백~2백평 정도로 쪼개져 거래돼 많은 소지주가 생겨났다. 소지주들에게 아파트를 지으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5년께부터 영동지구에는 단층 또는 2층짜리 건물이 드문드문 들어섰다. 또 옛 경기도 시절부터 살고 있는 농가도 더러 있었다.

서울시는 75년 8월 도시계획법에 '아파트지구'를 새로 넣어 줄 것을 건설부에 요청했다. 그리고 같은 달 영동지구 반포동.잠원동 일대 약 80만평과 잠실지구 20만여평을 아파트지구로 가(假)지정하고, 개인의 건축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76년 1월 개정된 도시계획법 시행령에 아파트지구가 들어갔다. 시는 압구정동.도곡동.서빙고동 등 11곳을 아파트지구로 추가 지정했다. 아파트지구로 지정되면 아파트만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아파트 건립 능력이 없는 소지주들은 땅을 건설업자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획정리사업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아파트지구로 지정해 아파트 건립 외 다른 건축 행위를 제한한 것은 명백한 재산권 침해였다.

영동아파트지구 지정(76년) 전에 강남지역에 아파트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74년 주택공사가 구반포에 99개동 3천6백여가구의 아파트를 지었고, 현대건설도 75년부터 압구정동 매립지에 23개동 1천5백여가구의 아파트를 건립했다.

그러나 강남 일대를 아파트숲으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76~77년 수립된 영동아파트지구 개발계획이었다. 아파트지구를 신설할 때 건설부는 개별 지구의 기본계획을 세워 건설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서울시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시는 우선 영동지구 내 4곳의 기본계획에 착수했다. 이때 천일기술단이 작성한 영동지구 아파트개발계획은 '근린주거'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 개념은 90년대까지 아파트 건설의 모델이 됐다. 78년 반포 우성아파트 4개동을 시작으로 강남구.서초구에는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다. 78년 주택경기 대호황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주변 아파트단지 조성이 원인이었다.

78년 잠원동.반포동 일대 신반포지구 아파트 건설붐은 두 가지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첫째는 아파트 가수요를 불러일으켜 아파트 분양가에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중 여윳돈이 아파트시장과 강남지역 땅투기에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78년 8월 8일 '부동산 투기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른바 '8.8조치'다.

둘째는 국민 주(住)생활의 일대 전환점이 됐다는 것이다. 주거 형태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연탄 대신 보일러와 도시가스가 일반화됐다. 이 같은 연료 혁명과 편리한 아파트문화의 확산은 주부 및 가정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