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대종교지도자 3인/60년만에 유해 돌아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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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5월 중국 길림성무덤 확인/보훈처 지원…내달 국립묘지 안장
일제시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민족종교 대종교의 제1대교주 나철홍암대종사와 제2대교주 무원종사,그리고 백포종사 서일 등 3인의 유해가 60여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대종교 김선적부전교 등 지도자들은 지난5월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호종산에 있는 이들 종단지도자들의 무덤을 확인하고 중국당국과 혐의,이들의 유해를 옮겨오기로 했다. 유해는 오는 9월10일 환국,국립묘지에 안장된다.
대종교지도자들의 무덤은 연변역사연구소 연구원 강용권씨에 의해 지난5월 확인되었다. 나란히 있는 3인의 묘소중 두사람의 비석은 남아있고 하나는 없어진 상태였다. 이 소식을 들은 대종교지도자들은 곧 중국으로 가 묘소를 참배했다. 대종교는 1909년 서울에서 나철대종사에 의해 단군교를 잇는 종교로 중광되었다.
단군한배검을 교조로 하고 홍익인간ㆍ현화세계ㆍ경천ㆍ숭조ㆍ애인을 3대정신으로 삼고 있다.
나철홍암대종사는 일제가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심하게 억압하자 1916년 구월산 삼성신사에서 기도하고 자결했다. 2무원종사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총본사를 중국 백두산부근 화룡현으로 옮겨 만주에서 교포들에게 포교하는 한편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종교는 교인 30만명에 달하는 큰 세력으로 자라나 항일투쟁에 나섰다.
백포종사 서일은 서좌진 등과 중광단이라는 대종교중심의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다.
3ㆍ1운동직후에는 북로군 정서라는 독립군부대를 편성하여 대종교청년들을 중심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1920년 청산리싸움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데 이들이 앞장섰다.
백두산에 위치했던 대종교는 서일ㆍ신규식ㆍ이동녕 등이 지도자가 되어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많은 교인을 잃고 북만주 영안으로,또 마산으로 총본사를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무원종사는 1921년 「민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한을 품고 자결했고 서일종사도 1923년 숨졌다. 이들의 묘소는 대종사와 함께 교인들에 의해 청호종산의 한자리에 만들어졌다.
민족의 얼을 이어가겠다는 정신으로 단군한배검을 모신 대종교는 민족수난기에 크게 일어났다가 쇠하는 과정을 거쳤고 종단지도자들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대종교는 1946년 고국에 돌아와 총본사를 서울에 옮겼다.
그러나 교단지도자들이 대부분 임정요인들로 정치에 전념했고 그들이 이승만정권에 의해 배척당함으로써 다시 교세를 일으키지 못했다. 또 교인이 만주에 많아 국내에 기반을 갖지 못한것도 큰 요인이었다.
보훈처는 이들 대종교지도자들의 유해환국과 국립묘지안장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기로 했다.<임재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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