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렌 출발 허망한 귀로/조현욱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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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제의 판문점취재는 정말 착잡했다. 오전 7시,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을 출발할 때만 해도 여느 판문점취재때와는 달리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김구선생이후 최초의 민간급 남북 내왕을 볼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것이 앞으로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등을 이모저모 따져보는 가운데 버스가 판문점에 도착했다.
오전 7시30분부터 열린 남북 연락관회의가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첫 브리핑은 낭보였다. 혹시나 북한이 트집잡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회담장소ㆍ숙소ㆍ안내방법 등이 8개항으로 타결됐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각종 남북왕래때 양측 당국간에 확립된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이제 전민련대표가 마중나와 함께 남행 차편에 오르기만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같은 안도는 곧 깨지고 말았다. 엉뚱하게도 전민련과 우리 당국간에 시비가 붙고 말았기 때문이다.
통일원당국자와 범민족대회엔 우익ㆍ보수단체까지 참여해도 좋다고 합의해줬던 전민련이 갑자기 정부는 빠지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회담장 결정,서울까지의 안내를 모두 전민련이 맡아 하겠다는 것이었다.
북측도 덩달아 태도를 돌변했다. 우리 총리에게 신변보장ㆍ편의제공을 요구했던 행동은 깡그리 입씻고 『우리는 전민련 초청을 받고 가니 전민련 주장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지루한 협상이 시작됐지만 이미 북한은 남행을 포기했음이 역력했다. 이같은 낌새를 챈 전민련이 오후 3시쯤 뒤늦게 정부의 입장을 수용하겠다고 태도를 바꾸었으나 이미 배는 떠나고 말았다.
이런 과정에서 북측 기자들은 『예비회담 자체가 중요하지,절차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는 남쪽 기자들의 물음에 『이 사람 기자가 아니구먼』이라며 버럭 화부터 냈다.
또 정부주도가 아닌 그들의 통일방안과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악전고투끝에 오늘의 상황까지 만들어낸 전민련이 왜 절차문제에 집착해 다된 밥에 코를 빠트렸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북측의 남행이 무산되자 전민련 대표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항의부터 했다.
판문점의 정부당국자 역시 『안내ㆍ경호 등은 정부가 해야 한다』는 원칙고수에 급급했을 뿐 사전에 전민련과 진지한 대화를 한 것같지 않았다. 전민련의 최종입장 변경을 북한에 통보하는 과정에서 핵심을 뒤로 돌리고 북한의 부당한 태도를 논박부터 한 것도 석연찮다.
이 모든 과정이 남북한의 수준을 보이는 것 같아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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