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철호칼럼

노무현과 김정일 그리고 사마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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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요즘 한반도가 호랑이 형상이 아니라 앞발을 치켜든 사마귀로 보인다. 착시 현상일까. 불행히도 고사성어에 등장하는 사마귀는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곤충이다. 결국 자신의 생명만 단축시킨다. 언제부터인가 수레를 막겠다고 나선다거나(당랑거철.螳螂拒轍), 참새가 뒤에서 노리는 것도 모르고 코앞의 매미 잡겠다(당랑규선.螳螂窺蟬)는, 사마귀에 얽힌 옛 성현들의 말씀에 무릎을 치고 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핵실험 버튼을 누르면서 1998년 5월이 재연되기를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달 12일 인도가 기습적으로 핵실험을 했다. 그러나 나흘 뒤의 G8 정상회담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 회의에 처음 참가한 러시아를 축하하는 덕담만 오갔을 뿐, 인도 핵실험에 대한 비난은 뒷전이었다. 주요국 정상들은 자국이 출전하는 프랑스 월드컵 예선을 TV로 봐야겠다며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이런 한가한 장면을 보면서 미소를 지은 곳이 파키스탄이다. 그달 28일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강행해 허를 찌르는 데 성공했다. 아마 북한도 내심 이런 시나리오를 가장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국제 사회가 유엔 안보리를 통해 신속하게 대북 제재를 결의했다. 상대방을 겨냥한 국지적 파문에 그친 인도.파키스탄과는 달리 북한 핵실험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위협이란 사실을 김 위원장은 오판했다. 눈앞의 핵무기에 정신이 팔려 뒤에 버티고 선 참새를 간과한 꼴이다.

요즘 청와대와 통일부에는 얼굴 없는 브리핑이 잦다. 고위 당국자들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은 유엔 제재와 관련이 없다는 소신을 밝힌다. 그러고는 "내 이름은 빼고 당국자라 표현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런 소신은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남북 경협에 대한 한국정부의 결정을 지켜보겠다"는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말 한마디에 벌써 꼬리를 내린다. 청와대 대변인은 "정부의 공식 견해가 아니다"고 발뺌했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현대아산을 찾아가 "금강산 파이팅""현대아산 파이팅"을 외치는 장면은 한마디로 코미디다. 다가오는 수레 앞의 사마귀를 연상시킨다. 만약 유엔 안보리 제재위원회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북한 지도부에 현금이 흘러가는 루트가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면 어쩔 건가. 만의 하나 결의안 이행 불응에 대한 제재로 현대상선 선박에 대해 미국.일본 항구의 입항 금지라도 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현대는 그룹 생존을 위해 대북사업에서 손 떼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게 훨씬 현명했다.

제대로 된 정부.여당이라면 지금 두 가지 시급한 사안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북한지역에 있는 우리 국민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방안부터 강구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은 정부의 최우선 존재 이유다. "북한에 있는 (남한)사람들이 인질이 될 수 있다"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의 경고를 흘려들어선 안 된다.

또 하나, 정부는 북한 핵실험에 대항해 확실하고 분명한 어조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 폐기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핵무기 제조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엄격한 사찰을 받으면서 평화적인 재처리와 고농축 기술을 개발하는 나라를 나무랄 수 없다. 핵무기에 관한 한 확실하게 미국의 핵우산 보장을 받으면서, 핵기술 분야에선 일본에 버금가는 핵사이클 완성을 서둘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정치적 목적으로 북한에 몰려가 "도대체 뭐가 불안하냐"고 맞장구 칠 때가 아니다. 걸핏하면 "그럼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냐"고 윽박지를 상황은 더욱 아니다. 정말이지 아마추어리즘의 바닥을 보는 것 같아 민망하기 짝이 없다. 북한 핵보다, 남북한에서 설쳐대는 겁 없는 사마귀들이 더욱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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