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걸객원의학전문기자의우리집주치의] 가장 고치기 힘든 병 '편집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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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정신질환은 무엇일까요. 많은 전문가가 동의하는 정답은 편집증(偏執症)입니다. 편집증이란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특정 대상에 대해 집요하게 의심하고 매달리는 병입니다. 비합리적인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과도한 적개심을 품고 엉뚱한 복수를 꾀합니다. 의처증이 대표적입니다. 아내가 매니큐어 색깔만 바꿔도 정분 났다고 의심합니다. 정신분열병과 강박장애를 섞어 놓은 듯합니다. 다만 터무니없는 망상에 시달리는 정신분열병과 달리 편집증의 망상은 체계적이며 논리적입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합니다. 환자의 말을 듣다 보면 의사들이 설득당하기조차 합니다. 강박장애와는 남을 괴롭힌다는 점에서 구분됩니다.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고 걸어야 마음이 편한 강박장애는 자신은 시달리지만 다른 사람을 괴롭히진 않습니다. 그러나 편집증 환자는 남을 공격하며 오히려 쾌감을 누립니다. 죄책감이라곤 없습니다.

매사에 음모론적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극단적으로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의처증 환자들이 보이는 수순은 한결같습니다. 먼저 아내의 통장을 빼앗는 등 돈줄을 통제합니다. 카드 내역을 조사하고 휴대전화 위치추적장치까지 몰래 설치합니다. 아내가 반발하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의 의처증도 널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야'라며 달래는 요령도 압니다.

문제는 이러한 편집증 환자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겉으론 볼 땐 지극히 정상적이며 오히려 주도면밀한 일처리로 출세가도를 밟습니다. 똘똘 뭉친 적개심으로 정적과 라이벌을 제거하는 데도 천부적 재질을 발휘합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편집증은 대개 어린 시절 받은 부모의 학대가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한창 응석 부려야 할 나이에 매를 맞지 않기 위해 우는 것을 참아야 하는 법부터 배웁니다. 냉혹한 현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혼자만의 울타리를 가득 치고 자랍니다. 남을 사랑할 줄도, 사랑받을 줄도 모르게 되지요. 어느 순간 반사회적인 편집증 괴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요즘 TV 드라마 '주몽'이 인기입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고 권좌에 오른 대소왕자가 연일 비난받고 있습니다. 대소왕자야말로 전형적인 편집증 환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측은합니다. 본처와 장자를 구박해 온 금와왕의 부적절한 처신이 낳은 희생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에 또 하나의 불행한 대소왕자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모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내 남편이 의처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혼을 불사하는 것이 정답일 듯싶습니다. 다시 한번 의처증으로 괴롭힌다면 갈라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편집증 환자들은 강자엔 약하고 약자엔 강하기 때문입니다.

홍혜걸 객원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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