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재조명, '역사를 훔친 첩자'

중앙일보

입력

우리나라의 춘추전국시대 격인 삼국시대. 삼국은 물론 중국과 왜까지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합종연횡과 암투모략을 일삼았다. 격변의 소용돌이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에 헌신한 숨은 영웅, 첩자가 있었다.

영화 '황산벌'이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첩자를 재조명했다. 고구려 역사를 담은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 드라마 3편도 첩자의 이야기를 짚어낸다. '세작'과 '향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첩자들은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 감초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첩자의 기원은 동서양 모두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의 스파이 역사가 16, 17세기에 출발했다면, 중국은 2000년 이상 앞선 전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우리나라 첩자는 기원 전후로 출현해 7세기, 삼국시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절정기로만 따져도 서양에 비해 1000년 가까이 앞선다.

고대 한·중 관계사를 전공하고, 13년 전부터 한국 고대사의 첩자 문제를 연구해온 저자가 우리 역사에 실존한 첩자들을 되살려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첩자활동의 사례를 분석, 치밀하고 다양하며 생동감 넘치는 첩자의 모습을 밝혔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 '손자병법' '육도', 일본의 '일본서기' 등 여러 기록을 동시에 비교, 분석해가며 객관적 시선을 유지했다.

삼국시대 기록에 남은 삼국간 전쟁 횟수는 275회다. 삼국시대 역사를 700년으로 볼 때 기록되지 않은 전쟁까지 포함하면 1년에 한 번 꼴로 전쟁이 일어난 셈이다. 전쟁은 첩자의 온상이며, 첩자는 전쟁의 산물이다.

고구려는 상당히 이른 시기인 기원 전부터 첩자를 썼다. 중원 왕조나 북방 민족과 국경을 접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비롯한다.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혼인관계를 첩자 활용의 수단으로 삼거나 승려들을 첩자로 적극 이용했다. 자신의 아내를 첩자로 둔갑시킨 호동왕자, 비수를 식기에 숨겨 적장을 암살해 나라의 위기상황을 타개한 유유, 심리전에 능숙했던 을지문덕,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위장간첩 승려 도림, 당 태종에게 사로잡혀 그 이름을 남긴 연개소문의 첩자 고죽리 등 문학소재로 삼기에도 넉넉한 사건과 사례가 적지 않다.

신라는 7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리며 생존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 결과 신라는 당과의 연합을 성사시켰고, 결국 삼국을 통합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일찍이 첩자의 중요성을 인식한 김유신의 구실이 상당히 컸다. 첩자에 관한 한 김유신은 군계일학이었다. 왕의 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왜로 간 박제상의 행적, 역사의 전기를 마련한 김춘추의 고구려행과 양국간 치열한 첩보전, 젊은 날 고구려에 잠입해 첩보활동을 벌인 거칠부 등 극적인 첩자가 많다.

백제의 첩자 활동이 성공해 신라를 낭패에 빠뜨리고 결국 김춘추를 궁지로 몰아 고구려행을 결행케 만든 대야성 전투 등 중대 사건도 있다. 특히 이 사건에는 신라 내부의 치정관계를 백제가 이용하는 등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요소가 다분하다. 고구려와의 칠중성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는 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신라인 이중간첩 비삽 등도 흥미를 더한다.

첩자와 관련한 백제의 기록은 열악하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수의 2차 전쟁 때 수와 고구려를 동시에 내통하는 줄타기 외교로 국가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왜에까지 첩자를 심어놓는 등 첩자 활용이나 첩보력이 만만치 않았다. 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부흥군 조직을 가동, 첩보 활동을 계속했다.

잘 키운 첩자 하나 백만대군 안 부럽다.

김영수 지음, 216쪽, 9900원, 김영사.

【서울=뉴시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