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영화만담] '구미호'가 물구나무 선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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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구미호 가족'은 인간이 되고픈 구미호들 이야기입니다. 엽기적인 설정과 달리 실상은 하나도 엽기적이지 않은 뮤지컬 영화로 만든 점이 신선하다는데, 저에겐 이 영화가 또 다른 이유로 흥미롭습니다. 인간 기동이(박준규)가 우연히 구미호 가족 첫째 딸(박시연)과 마주치는 장면이 화근이었더랬죠. 서커스 에서 공중 그네를 타던 구미호가 엉겁결에 기동이 앞으로 뚝 떨어져 상호 겸연쩍은 자세로 마주친 이 순간. 왜 얘는 굳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겁니까. 얼마 후 기동이를 홀릴 요량으로 시작한 가열찬 재주 넘기가 물구나무 서기로 마무리되는 순간. 왜 하필 물구나무 자세여야 했느냐고요. 참 쓸데없는 호기심을 저는 이렇게 풀어보았습니다.

어릴 적 다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본 적 있을 겁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들 틈만 나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폴더가 되었을까. '털 없는 원숭이'의 저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쓴 책 '피플 워칭'(까치)에 해답이 나옵니다. "물구나무 서기는 유아기 놀이의 가장 원초적 형태 중 하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른바 '현기증 놀이'를 언급하면서 연속 구르기, 회전 게임, 재주 넘기와 함께 물구나무 서기를 콕 집어 얘기하는 겁니다. 이 저명한 동물 행동 연구자 양반은 그런 놀이에 집착하는 까닭을 "신체 운동의 극단에서 느끼는 황홀경을 만끽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그럴듯하게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느끼는 현기증의 쾌감보다는 사물을 뒤집어 보는 쾌감이 더 컸더랬죠. 남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느끼는 묘한 흥분 말입니다. '바람난 가족'에서 문소리가 어두운 밤 집 안 거실에서 발가벗은 채 홀로 물구나무를 섭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시부모에, 바람난 남편에, 애 녀석에, 고등학생 애인에… 숱한 관계로 뒤엉킨 이 갑갑한 세상을 확 뒤집을 재주는 없고, 에라 모르겠다 제 몸이라도 홱 뒤집어 보자는 심사는 아니었을까요. 적어도 자기 눈에 보이는 건 전복된 세상의 질서일 테니 말입니다. 어린 시절 철봉에 매달린 우리들이나, 아닌 밤중에 발가벗고 물구나무 선 문소리나 결국 다 같은 욕망의 소유자일 거라 짐작됩니다.

영화도 결국 물구나무 선 이미지들의 집합입니다. 카메라에 상이 맺히는 원리가 그렇잖습니까. 어쩌면 사람 앞에 물구나무 선 채로 마주 선 구미호는 우리 무의식의 필름 위에 거꾸로 맺힌 인간 자신의 형상과 다름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 죽고 나 살자며 서로에게 악다구니로 덤벼드는 요즘 사람들이 나, 남의 간 빼먹으려 덤비는 구미호나 다를 게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오랜만에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섭다고요? 잘됐네요. 간이 콩알만 해져서 적어도 구미호의 표적이 되지는 않을 테니.

김세윤 (영화칼럼니스트)

◆영화 칼럼니스트 김세윤(33)씨는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이자 영화잡지 '필름 2.0' 객원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헐크 바지는 왜 안 찢어질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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