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개기월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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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개기월식'- 안현미(1972~ )

사내의 그림자 속에 여자는 서 있다 여자의 울음은 누군가의 고독을 적어 놓은 파피루스에 덧쓰는 밀서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울음인지 밀서인지 고독인지 피아졸라의 음악처럼 외로운 것인지 산사나무 꽃그늘처럼 슬픈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그게 다인지 여자는 눈, 코, 입이 다 사라진 사내의 그림자 속에서 사과를 베어먹듯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말하자, 고 중얼거리며 사내의 눈, 코, 잎을 다 베어먹고 마침내는 그림자까지 알뜰하게 다 베어먹고 유쾌하게 사과의 검은 씨를 뱉듯 사내를 뱉는다.



휴, 다행이다. 삼켰더라면… 실은 사랑은 그렇게 다 베어먹는 것이다. 그런데 끝내는 베어먹히지 않는 것이 사랑의 운명이다. 그래서 사랑이라고만 말하면 된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랑.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아름다운 사랑이다.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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