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상(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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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쿠마라지바(鳩摩羅什.구마라습)가 번역한 불가(佛家) 최고 경전 금강반야바라밀경에는 '네 가지 상(四相)'이 나온다. 생을 받아 태어난 중생에게 나타나는 네 가지 집착이다. 자신의 견해에만 집착하는 아상(我相)이 첫째다. 윤회의 길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우월감(人相), 스스로 부처만 못하다고 여기는 중생상(衆生相), 옳고 그름은 놔두고 지위만을 내세우는 수자상(壽者相)이 다음이다.

이 네 가지 상에 대한 해석은 사실 여럿이다. 쿠마라지바가 한자로 번역한 경전에만 비교적 뚜렷할 뿐 다른 번역본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면서 나타난다. 학자들의 뜻풀이도 다양하다. 하지만 상이라는 글자에 대한 의견은 대동소이하다. 'nimitta'라는 산스크리트어 원어를 사물의 외관에 대한 집착이라는 뜻에서의 '상(相)'이라는 글자로 풀어냈다.

잘난 체하고 교만한 사람을 "아상이 지나치다"고 표현하거나, 본질은 놓아둔 채 외형만을 따지고 드는 사람에게 "상에 대한 집착이 과도하다"고 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턴가 상이 횡행하는 분위기다. 개혁과 청산을 앞세우고 지금까지도 쉼 없이 물의(物議)를 빚고 있는 대통령은 '개혁.청산상'이라는 말을 붙일 만하다. 그 밑에 옹기종기 모여 힘을 과시하는 386 운동권 출신 참모들에게는 '코드상'을 부여함 직하다.

북한을 마주한 국방의 현실과 우리 국력의 크기를 헤아리지 않고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급한 모습을 보이는 태도는 '자주(自主)상'이 그럴 듯하다. 그 반대편에서 전작권 환수에 대한 미국의 의도는 놔둔 채 정권의 실정(失政)만을 외쳤던 이들에겐 '수자(守者.지키려고만 드는 이)상'이 어떤가.

집권당의 실정에 편승해 반사이익만을 누리려 드는 야당에는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의 '수자(受者)상'을 붙이고 싶다. 사회에서 증폭되고 있는 오해와 갈등을 줄이지는 못한 채 집권층이나 가진 자들의 일부 행태에 비판만을 앞세웠던 언론에는 '평자(評者)상'을 붙이면 과도한 일일까.

내일은 덜할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는 추석이다. 둥근 보름달이 온 강산을 비추는 날이다. 기울지도 않고 이지러지지도 않은 보름달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까. 세상의 모든 강을 비추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경계, 두루 다 갖춘 보편성의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는 달의 심상(心像)을 우리가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유광종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