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외국자본 이탈, 어떻게 볼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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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무역과 자본거래 규모가 엄청난데 원화를 결제통화로 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보니 외환보유액이 2000억 달러를 넘고 있지만 자본 유출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불안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1997년 해외자금이 무너진 댐에서 물 빠지듯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나라 경제가 곤두박질쳤던 외환위기의 기억이 그만큼 아픈 것이기 때문이리라.

일단 최근의 자본유출은 주식투자자금에 집중되어 있어 과거와 같은 외환위기의 전조로 보기에 지나친 감이 있다. 당시 자본 이탈은 광범위했다. 단순히 주식투자자금 이탈뿐 아니라 국내 은행과 기업들이 해외에서 빌려온 자금의 만기연장이 불가능했고 한국 진출 기업의 철수 등도 있었다. 이런 당시 상황에 비해 아직도 외국계 투자자들이 매물로 나온 서울의 오피스 빌딩들을 매수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아도 당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대규모 자본 유출 움직임은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에서 시작되어 동북아까지 번지며 우리나라가 막차를 타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근래 아시아지역 국제 주식투자자금 행태의 특징은 한국에서만 비중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연간 아시아 6개국(한국.대만.인도.태국.필리핀.인도네시아) 중 외국인이 순매도를 보인 나라는 한국(31억 달러)과 인도네시아(17억 달러)뿐이었고, 올해 8월까지 자료를 보면 앞에서 언급한 나라들 중 88억 달러의 순매도를 기록한 나라가 한국이 유일하다. 아무리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꺼림칙한 추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주식시장 전문가들은 그동안 외국투자가들의 우리 시장 보유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를 낮추는 조정 과정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보다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시장으로의 이동, 정보기술(IT) 경기의 상대적 부진, 원화 고평가로 원화자산에서 달러자산으로 갈아타 생기는 큰 환차익 등이다. 하지만 일부 언급된 나라에서도 IT가 중요하고, 자국 통화의 절상이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궁색하게 들린다.

물론 주식투자자들의 행동이 늘 이성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 시장에서의 이탈이 2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은 단기적.비이성적 집단행태로 보기에는 너무 일관성이 있다. 장기적으로 주식시장의 움직임은 기업들의 가치와 그 나라 경제 전체의 활력에 비례한다. 이런 관점에서 작금의 추세를 해석하면 외국투자자들이 2년여 전까지 가졌던 우리 경제에 대한 기대와 현실에 괴리가 생겨 우리 시장을 떠나는, 이른바 '발로 투표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3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수출 호조세 둔화와 좀처럼 회복 기미가 없는 내수 부진 등이 중요한 경제적 이유이다.

단기간 내 우리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투기자본 논란, 북한 문제, 불투명한 대외관계, 선거철의 국내 갈등 등 경제외적 요인들이 점점 모여드는 먹구름처럼 보여 일단 피하는 것이 안전해 보이는 나라로 비치고 있다 하겠다.

물론 이런 위험 요인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나라가 예상보다 훨씬 왕성한 성장을 기록하여 기업들이 수익을 크게 낼 수 있는 상방위험(upside risk)이 있다면 국내에 남아 있을 투자자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이것이 순전히 외국투자자들만의 일은 아니다. 그들의 빈 자리를 연기금 등 국내 투자자들이 메우고 있어 만일 폭우가 내리면 우리의 수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일부 국내자금의 유출도 이런 우려의 방증으로 보인다.

허찬국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