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가 있는 우물'- 고찬규(1969~ )
달밤, 고목 아래
평생을 같이한
긴 혀 늘어뜨린 개 한 마리와
늘어진 러닝셔츠를 입은 늙은이
은행잎은 한껏 가랑이를 벌려 부채가 되었다
허여멀건 달밤,
잎잎은 한낮에 박힌 햇살에
희푸르게 멍들어 있다
남정네 여인네 할 것 없이
몇을 삼키고도
퍼내도 퍼내도 고여 있는
눈물,
늙은이가 밤새 길어올린 것은
맨가슴에 뿌리박은 긴 한숨이었겠다
설움을 많이 삼켜서 마음속에 깊은 우물이 생겼다. 우리네 아버지가 다 그렇고 그렇다. 동네 어귀의 은행나무도 동네 설움을 일 년 내내 다 삼켜서 가을이면 잎잎에 모두 고름물이 든다. 그럼에도 매해 봄이면 또 새 삶이다. 그렇게 신령스러워진다. 일생이 맨가슴에 나무 한 주 가꾸는 것이다.
<장석남.시인>장석남.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