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은행나무가 있는 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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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은행나무가 있는 우물'- 고찬규(1969~ )

달밤, 고목 아래

평생을 같이한

긴 혀 늘어뜨린 개 한 마리와

늘어진 러닝셔츠를 입은 늙은이

은행잎은 한껏 가랑이를 벌려 부채가 되었다

허여멀건 달밤,

잎잎은 한낮에 박힌 햇살에

희푸르게 멍들어 있다

남정네 여인네 할 것 없이

몇을 삼키고도

퍼내도 퍼내도 고여 있는

눈물,

늙은이가 밤새 길어올린 것은

맨가슴에 뿌리박은 긴 한숨이었겠다



설움을 많이 삼켜서 마음속에 깊은 우물이 생겼다. 우리네 아버지가 다 그렇고 그렇다. 동네 어귀의 은행나무도 동네 설움을 일 년 내내 다 삼켜서 가을이면 잎잎에 모두 고름물이 든다. 그럼에도 매해 봄이면 또 새 삶이다. 그렇게 신령스러워진다. 일생이 맨가슴에 나무 한 주 가꾸는 것이다.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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