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blog] '북녀들이 선사한 축구의 감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끝난 세계 여자청소년(20세 이하) 축구대회에서 북한이 우승을 했습니다. 대단한 '사건'입니다. 저는 그 대회에서 심판을 봤습니다. 내년 중국에서 열리는 여자 월드컵을 앞두고 세계 여자 축구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죠.

대회 첫날이었던 8월 17일, 제가 심판을 봤던 구장과 북한 경기가 열리는 구장이 달라 북한-독일의 경기를 직접 보진 못했어요. 현재 여자축구 FIFA 랭킹 1위로 평균 신장이 1m80㎝를 훌쩍 넘는 듯하고 남자 못지않은 체격에 스피드와 공중 볼 다툼에 능한 독일을 북한이 이겼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호텔에 돌아오자 다른 심판들이 북한이 2-0으로 독일을 쉽게 눌렀다며 저에게 축하한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물론 기분은 좋았지만 '아, 이 사람들이 또 남북한을 구별하지 못하는구나'하고 생각했죠. 수백 번도 넘게 'Korea Republic'과 'DPR Korea'를 설명해 줬건만…. 다들 북한의 플레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어요.

대회 개막 전 대부분 미국.브라질.멕시코.독일을 우승 후보로 꼽았죠. 북한은 독일.멕시코.스위스와 '죽음의 조' 에 속해 예선 통과 전망도 밝지 못했어요.

북한의 두 번째 경기인 스위스전을 모스크바 다이나모 경기장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전체 관중의 반 이상이 북한 응원단이었어요. 러시아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가 상당수였죠. 북한 선수들은 90분 내내 일방적으로 스위스를 밀어붙였습니다. 훈련량이 상당히 많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플레이의 기복이 크지 않다는 것과 득점원이 다양하다는 것도 발견했죠.

준결승에서 북한이 브라질을 1-0으로 이기고, 중국이 미국을 승부차기로 꺾었습니다. 설마 했던 아시아 국가 간의 결승전이 현실이 됐어요. 북한과 중국은 7월에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열린 여자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만나 북한 선수들이 심판을 폭행하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죠. 그런데 언니들과 달리 북한의 어린 선수들은 실력도 뛰어났고 플레이도 깨끗했어요. 수중전으로 치러진 결승전에서 북한 선수들은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우승을 향한 집념으로 무려 다섯 골을 넣어 예상외의 큰 점수 차로 중국을 꺾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상에 우뚝 선 북녀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가능케 되고, 예상치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고, 흘린 땀방울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과 환희를 주고…. 이것이 우리가 축구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이 아닐까요?

모스크바=홍은아 통신원 (여자 국제축구심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