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토막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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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토막말' - 정양(1942~ )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껐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저 사내의 소원과 흡사한 문구가 서울 거리에 나붙은 적이 있다. '선영아 사랑해'라고 쓴 현수막. 광고주는 벌금 몇 천만원을 내고, 그 몇 배에 달하는 광고 효과를 거뒀다고 한다. 저 사내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정순이랑 알캉달캉 한 살림 차렸을까.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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