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학계, 무더기 이름 도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진보학자를 자처하는 학계 인사들이 대(對) 노동계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학자들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명의를 도용당한 학자들은 "호소문에 동의한 적이 없고, 본적도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호소문을 만든 측이 공식 사과를 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호소문은 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대환 인하대 교수와 김유성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전 서울대 교수)의 이름까지 도용했다. 호소문은 산업사회학회와 산업노동학회가 주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 '273명이 서명한 호소문'=15일 일부 언론사에 진보학자를 자처하는 학계 인사 273명 명의의 성명서가 전달됐다. '진보학계에서 노동조합원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은 "산별노조로의 조직 전환을 간곡히 당부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성명서는 "로드맵은 노조를 심각한 위기에 몰아넣을 것" "노사관계 선진화를 명분으로 노조를 크게 약화시킬 로드맵이 추진되고 있으며, 나아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호소문은 대응책으로 "산별노조는 노동자 모두를 하나의 조직으로 포괄하고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밝혔다. 이어 "19일부터 30일까지 민주노총의 여러 산별연맹이 대대적인 산별노조 전환투표를 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며 "이번 기회에 우리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 노동부 관계자는 "산별노조 전환투표를 앞둔 민주노총 금속연맹과 일부 학자가 사전에 교감을 갖고 만든 호소문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 "금시초문이다"=이 호소문에 서명한 것으로 발표된 273명 중 상당수 학자가 "나는 서명한 적이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황한식 부산대 교수는 "호소문을 보지도 못했는데 무슨 서명이냐"며 "본인 동의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다. 임종률 성균관대 교수는 "금시초문이다. 어떻게 내 이름이 들어 있느냐"며 오히려 기자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이철기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일 것이다. 다시 확인해 보라"며 서명자 명단에 자신이 포함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사실이 확인되자 "내가 맞는데, 나는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동의한 적도 없다"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호소문 서명자로 발표된 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은 "내가 서명을 안 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노동연구원 소속 연구원들이 서명자로 많이 끼어 있는데,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호소문 작성과 발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산업사회학회 조돈문(가톨릭대) 교수는 "호소문 참여 여부를 e-메일로 묻기로 했는데 메일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해명했다.

◆ "지식사회가 정치 하나"=서명자로 돼 있는 김대환(전 노동부 장관) 인하대 교수는 "호소문을 만든 측에 공개적으로 정정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법적 조치까지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학자가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면서도 "특정 사안에 대해 학문적 권위를 내세워 노조원을 설득하고 강요하는 것은 학자가 할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단순히 실수라고 보고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라며 "지식사회가 정치 하는 것도 아니고, 개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명의를 도용하는 것은 학자의 양심을 속이는 행위"라고 말했다. 노사정위 관계자는 "학자라면 산별 체제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이걸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학문적인 탐구를 먼저 해야 한다"며 "본연의 일을 젖혀두고 노조원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에 끼어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기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