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암살범은 5명의 팀 … 보수우파 배후로 추정할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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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몽양 여운형(1886~1947.사진)은 12번의 피살 위협 끝에 1947년 7월 한지근이 쏜 총탄에 숨졌다. 당시 정치인에 대한 암살 시도가 그만큼 많았고, 중도파 몽양은 좌우 정치세력 모두로부터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암살 배후와 동기는 아직 미스테리다.

정병준(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에 따르면 암살자는 5명의 팀이었다. 그 중 가장 어린 한지근(22세)만 나이를 '19세(미성년)'로 속여 사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개성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6.25전쟁이 터져 인민군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 교수는 "암살 배후를 단정짓기는 힘들다. 하지만 학계는 당시 정세와 정황 증거로 미루어 추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 몽양은 좌우합작 노선을 제창하며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몽양이 암살당할 당시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해진 시점이다. 이에 따라 남로당 등 공산주의 세력 상당수는 이미 남쪽에서의 권력장악을 포기하고 대부분 월북했다. 이런 정황에서 몽양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은 보수우파 정치인들이었다.

보수우파 정치인들의 배후 가능성이 점쳐지는 까닭이다. 사건 직후 극좌와 극우 민족주의 세력 배후설까지 제기됐으나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무 것도 없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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