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 관계 개선, 속도보다 질이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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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근 한국과 소·동구관계의 급속한 발전은 『빠르냐, 느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충분한 지식과 확고한 방침이 뒷받침돼야할 질의 문제』 라고 미국의 저명한 소련학자 「게일·래피더스」교수가 말했다.
한국 슬라브학회 (회장 이인호 서울대교수) 와 국제문화협회 초청으로 방한한 미 버클리대 「래피더스」교수는 현재 버클리-스탠퍼드 대학 공동연구기관인 소련연구소소장으로 있는 중진학자다.
다음은 「래피더스」교수와의 회견내용이다.
- 「고르바초프」서기장은 지난 7일 유럽 주둔 소련군 50만 명 감축을 비롯한「일방적인」재래식 군비축소 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고르바초프」의 이번 제안은 미국에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다. 또 그의 제안이 전혀 놀랄만한 것도 아니다. 우선 지적할 것은 소련 지도부내에 군사력 감축에 대해 일반적인 합의가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과거 소련이 추구해온 외교정책은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과도한 군사력에 바탕을 둔 소련의 안보정책은 오히려 소련의 안보를 위태롭게 한 것이다.
특히 「고르바초프」집권 후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개혁에 필요한 물적·인적자원을 군사부문으로부터 민간부문으로 돌리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다.
이번 유엔에서 「고르바초프」의 군사력 감축제안 내용이 소련군사력의 전체 규모에서 보면 양적으로 큰 것은 아니지만 그 같은 제안으로 세계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평가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르바초프」 제안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그것을 정권교체기의 외교적 공백기에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잡기 위한 시도로 보고있는데….
『「고르바초프」라는 지도자는 성격상 매우 적극적이며 행동적인 사람이다. 더구나 그는 현재 자신의 개혁정책의 성패를 놓고 매우 다급한 입장에 있다. 미국의 차기정권이 자리잡기를 기다릴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번 제의는 그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중소정상회담문제로 화제를 돌려보자.
『내년 봄 양국 정상이 만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태진전이며 소련의 대아시아정책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후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관심을 집중해 왔다. 86년 블라디보스토크선언, 그리고 지난 9월 크라스노 야르스크 평화 제안이 그것이다.
그 동안 소련은 중소관계정상화를 위한 선결조건을 앞장서 실천해 왔고 지금에 와선 관계정상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소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앞으로 있을 양국 정상회담은 그 동안의 관계정상화 과정을 정치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중소문제가 해결되면 「고르바초프」외교의 다음 목표는 일본과 한국이라고 하는데….
『소련이 일본·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들 두 나라는 거대한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다. 또 그에 걸맞게 이 지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다.
소련은 이 지역에서의 정치·경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특히 소련이 지금 국운을 걸다시피 하고 있는 시베리아개발에 있어 한일 두 나라와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소련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본·기술을 이들 두 나라로부터 얻기를 고대하고 있다.
문제는 한일 두 나라는 소련에 무엇을 제공하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앞으로 소련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은 북한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최근 들어 정치적으로 더욱 고립돼 가고있다.
따라서 한국이 소련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 유지하느냐에 따라 대북한관계· 한반도 긴장완화, 그리고 나아가 한반도 통일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중요한 문제다』
-서울올림픽 이후 한소, 한· 동유럽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혹자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있는데.
『내 의견으로 그것은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다. 다시 말해 관계 개선이 빠르냐, 느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충분한 지식과 확고한 방침 없이 추진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전문인력의 확보가 급선무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방안으로 한국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각종 연구기관들, 즉 정부·대학·민간기억의 연구인력·연구성과를 합리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효용을 극대화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정부·민간차원에서 이들 연구소·연구인력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정우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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