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핸드볼 금 따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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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금곰 사냥길에 나선 한국낭자군의 기개는 의외로 당당했다. 코트에 들어서는 낯빛이 서릿발같았고 정작 경기에 임해서는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전혀 허둥대거나 서두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는 세계최강 소련,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국제무대에서 단 한 차례도 져본 적이 없다니 감히 넘볼 수 없는 무적함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선택은 오직 하나, 최선을 다한 후 의연하게 결과에 승복하는 것뿐이다.
실상 한국은 소련의 적수가 될순 없다는게 지배적인 분위기. 한국은 역대 대표팀간 전적에서 2전2패를 기록 중인데다 평균신장(소련1m78㎝·한국 1m69㎝) 또한 월등히 뒤져 있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맞대봐야 하는 법. 전력열세를 무릎쓰고 필승을 다짐하는 여자대표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을 따름이다. 과연 「수원성 대첩」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이윽고 차임벨소리. 몇 차례 공방전이 오가는가 싶더니 이날 한국승리의 기폭제가 된 선제골은 뜻밖에도 신예 임미경에 의해 터져나왔다. 성경화의 짧은 패스를 넘겨 받은 임이 우측 9m라인선상에서 통렬한 중거리슛을 성공시킨 것. 소련GK 「미트류크」의 허를 찌른 기습이었고 한국이 초반기선을 제압하는 회심의 거사였다. 55초만이었다.
소련은 이내 「토프스토간」의 중거리슛으로 따라붙었지만 상승무드를 타기 시작한 한국은 김현미의 다이빙슛, 김춘례의 페널티스로로 연속두골을 따내 3-1, 6-4로 앞서나갔다.
반격에 나선 소련은 15분쯤 라피츠카야의 점프슛과 「이모바」의 중거리슛으로 거푸 2점을 뽑아 6-6 타이를 이뤘으며 한국이 한골로 주춤한 사이 「이모바」가 한골, 「모르스코바」가 두골을 터뜨려 917로 전세를 뒤엎었다.
한국은 이 고비에서 임미경의 외곽슛이 되살아나 연속 두골을 뽑은데 이어 성경화·석민희가 각각 한골씩을 보태 단숨에 11-9로 대역전, 다시 리드를 잡았다. 전진수비에 이은 기민한 속공이 주효, 소련공격수들을 발 묶어두는데 성공했던 것. 결국 전반은 13-11 한국의 2점차로 리드였다.
후반들어 임미경의 활약상은 강도를 더했다. 차임벨소리와 함께 두 차례의 그림같은 중거리슛이 소련 네트를 갈랐고 성경화마저 가세, 4점차나 벌려놓았다. 소련의 「네마슈칼로」가 발목부상으로 실려나간 것도 이때였다.
16-12 후반7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반격은 매서웠다. 노련한 게임메이커인 주부선수 「지나이다·투르치나」(42)의 손놀림이 빨라진 것과 때를 같이해 장신 「모르스코바」(1m86㎝)가 두골, 고르프·라피츠카야·「카를로바」가 각각 한한골씩을 뽑아낸 것. 모르스코바를 포스트에 내세운 중앙돌파가 적중, 내리 5점을 허용함으로써 한국은 비로소 치명적인 위기를 맞게된다.
후반종료 10분전이었다. 전광판의 스코어는 17-16, 소련의 리드였다.
줄곧 게임의 주도권을 잡아온 한국으로서는 처음맞는 최대의 위기였다. 개중에는 이제 소련의 본 실력이 나오는게 아닌가 하며,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는 한국에 자조섞인 동정론을 펴는 관중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벤치는 의외로 침착했다. 선수교체를 틈타 선수들에게 강압밀착수비로 소련 공격리듬을 중앙선 부근부터 차단할 것을 주문하는 한편, 절대 서두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투지좋은 김명순을 포스트에, 포스트 김현미를 오른쪽이너로 전환 배치한 것도 이때였다.
이같은 작전은 곧바로 맞아 떨어졌다. 임미경이 다이빙슛으로 17-17로 따라 붙은 후 이날의 수훈갑 김현미가 절묘한 드라이브에 이은 점프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렸던 것. 찬스는 계속 이어졌다. 좀처럼 흔들림이 없었던 「투르치나」의 몸놀림이 둔해지면서 패스 미스 한 볼을 김현미가 잽싸게 가로채 추가골을 성공시킴으로써 20-17 3점차로 앞서 승운을 불러들였던 것. 한국으로서는 소련수비실책에 편승한 행운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4분54초.
전황의 불리를 눈치챈 소련은 한국수비진의 파울을 유도하는 파상공세를 펼치면서 한국문전으로 파고들었다. 발빠른 「이모바」의 페널티스로 성공으로 1점을 추가, 20-18로 따라붙은 소련은 그러나 계속된 찬스에서 만코바가 지나치게 서두른 나머지 어처구니없는 워킹파울을 범하고 만다. 전혀 예기치 않던 또다른 행운이 한국에 찾아든 것이다. 2분44초전, 아직은 추격전을 벗어났다고 방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하나 승리의 여신은 분명 한국쪽에 있었다. 소련문전 우측에서 김현미의 재치있는 패스를 방은 김명순이 몸을 날리며 점프슛, 다시 한골을 추가함으로써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림같은 콤비플레이가 엮어낸 걸작품인 이골은 결국 소련의 추격에 쐐기를 박는 천금같은 것이었다. 소련은 35초를 남기고 「모르스코바」가 한골을 만회했으나 이미 한국을 따라잡기엔 역불급이었다.
이에 앞서 소련 고르프의 단독 드라이빙슛을 육탄 방어한 GK 송지현의 선방 역시 눈부신 것이었다. 21-19, 한국이 당초 예상을 뒤엎고 소련에 2점차로 승리, 감격의 금메달을 목에 건 순간 스탠드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를 방불케 했다.
세계핸드볼계에 「수원성의 반란」으로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 이날 한국의 승전보는 충격과 감격이 한꺼번에 교차된 잊지 못할 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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