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수영 자존심 지켰다|세계기록 다시 경신…남자 계영 8백m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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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1일 오후2시 올림픽수영장-. 흥분된 1만 관중이 뿜어대는 열기로 실내는 한증막처럼 달아올라있었다. 심상찮은 술렁거림-. 그들은 곧 벌어질 경기가 얼마나 극적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미리 예감하고 있는 듯 했다.
『선수입장-.』
2m안팎의 거한들이 긴장된 걸음걸이로 천천히 입장, 4명씩 짝을 이뤄 출발대 앞에 멈춰 섰다.
초조한 표정, 긴장된 근육…. 첫 영자들이 풀의 물을 떠 몸을 적시는 것을 바라보던 나머지 선수들이 스트레치 체조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어버릴 듯 요란한 함성과 박수가 실내를 뒤흔들었다.
남자계영 8백m.
이 종목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강세종목
미국은 계영8백m까지 올림픽수영종목으로 첫 채택된 60년 로마올림픽부터 그들이 불참했던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6회 출전에 모두 금메달.
그러나 과거 경력만으로 미국이 안심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86년 마드리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은 동독·서독에 이어 3위로 밀려나기도 했다. 87년 스트라스부르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서독은 그때까지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세계최고기록을 2초59나 앞당긴 7분13초10의 세계신기록을 세워버렸다.
서독은 특히 84올림픽과 86세계대회에서 간발의 차이로 계속 2위에 그친데 대한 울분을 서울올림픽에서 반드시 풀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서독수영의 간판스타「미하엘·그로스」는 입국 후 기자회견을 통해『올림픽 2연패라든가 다관왕같은 것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은 우리 팀을 계영8백m의 우승자로 만들어놓는 것이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도 있다.
「비온디」도 비장했다. 도대체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 종목에서만은 기필코 우송을 따내 반분이나마 풀어야겠다는 표정이었다.
미국과 서독의 최종영자는「비온디」와「그로스」. 만만찮은 복병 호주의 최종영자는 자유형2백m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폭풍을 일으켰던「덩컨·암스트롱」이었다. 『준비-』 출발대에 올라선 첫 영자들은『붕-』하는 출발신호와 함께 힘차게 물로 뛰어들었다.
찢어지는 듯한 박수와 함성이 물살을 가르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5번 레인의 미국이 선두로 나섰고 그 뒤를 1번 레인의 스웨덴, 4번 레인의 동독과 6번 레인의 호주가 뒤따랐다.
그러나 미국의 첫 영자「트로이·다르비」는 후반 체력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었다.2백m제1구간이 끝나자 순위는 뒤집혔다. 뜻밖에 스웨덴이 1위 동독·호주·이탈리아에 이어 미국은 5위, 3번 레인의 서독은 6위였다. 제2구간에 접어들자 순위는 바뀌었다. 이탈리아·동독·스웨덴·서독순. 미국은 여전히 5위.
레이스의 절반이 끝났는데 미국은 선두 이탈리아보다 1초29나 뒤져있었다.
고전하던 미국에 기사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선수는 제3영자「더글러스·게르스텐」이었다. 그는 폭발적인 스트로크로 추격을 전개, 서독·이탈리아 등을 따돌리고 2위로 터치패드를 짚었다. 1위인 동독과는 0.82초차. 미국 응원단의 발악에 가까운 성원을 등에 업고 출발대를 박찬「비온디」는 무서운 속력으로 동독의 최종영자「스테펜·제스너」에 따라붙었다.
마지막 2백m구간의 절반쯤인 90m지점에서「비온디」는 선두를 탈환했으며 이후 줄곧 앞서나갔다.
자유형2백m와 접영1백m에서 막판 추월 당해 분투를 삼켰던「비온디」는 옆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물을 헤쳐 나갔다. 골인. 세계신기록(7분12초51)이었다. 2위 동독(7분13조68), 3위 서독(7분14초35), 4위 호주(7분15초23)….
전광판을 황급히 쳐다본「비온디」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관중들의 함성에 파묻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환호성을 몇 번이나 올렸다. 풀사이드의 미국임원·선수들도 서로 얼싸안고 뛰어다녔다. <김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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