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최악 유혈 사태…"중동 소방수였던 美 방화범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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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백악관 보좌관이 예루살렘 대사관 이전 개관식에서 웃고 있는 동안 가자지구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백악관 보좌관이 예루살렘 대사관 이전 개관식에서 웃고 있는 동안 가자지구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개관한 14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접경에서 이스라엘군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나왔다. 팔레스타인이 살던 땅을 뺏긴 것을 기억하려고 ‘나크바(대재앙)의 날'로 정한 15일 가자지구에서는 사망자들의 장례가 치러졌다.

이방카 웃는 동안 어린이 8명 포함 최소 58명 사망 #살던 땅 빼앗긴 15일 '대재앙의 날'에 장례 치러 #유엔 등 과잉 대응 비판 속 백악관은 "정당한 대응" #"보수파 의식 트럼프의 돌출 외교로 美 문제의 한 축 돼" #

 전통적으로 중동에서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모색해와 소방수로 불린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외교로 방화범이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자지구 보건당국은 전날 이스라엘군의 발포로 어린이 8명을 포함해 최소 58명이 숨지고 2700여 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시위대 관계자가 "15일에는 장례를 치르는 날이고, 가자지구 접경으로 행진하는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매체는 시위대가 쳐놓은 텐트 일부가 치워졌다고 보도했다.

 유혈 사태에 대해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이스라엘이 대학살을 저질렀다"며 사흘간의 애도 기간과 이스라엘 북부지역 등에서의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 중동 국가들도 이스라엘의 무력 대응을 비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항의의 표시로 이스라엘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송환했다. 터키도 이스라엘과 미국 주재 자국 대사를 불러들일 계획이다.

미국이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것에 항의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가자지구 접경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이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것에 항의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가자지구 접경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스라엘군의 폭력 사용을 비난한다"는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2국가 해법'을 거듭 강조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이스라엘에 무력 사용의 최소화를 촉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번 사태에 대한 성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라즈 샤 백악관 부대변인은 하마스에 유혈 사태의 책임이 있다며 “이스라엘은 스스로 방어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두둔했다.

 전날 개관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백악관 보좌관은 미소를 지으며 대사관의 이전 개관을 공식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에서 “우리의 가장 큰 희망은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미국은 지속적인 평화협정을 가능하게 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샤 부대변인은 “지금은 아니지만 (미국 정부는) 평화협정 안을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큐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예루살렘의 미 대사관 개관식에서 축하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큐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예루살렘의 미 대사관 개관식에서 축하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면서 중동의 갈등은 깊어지고 있다. 뉴아메리칸시큐러티센터의 중동 프로그램 책임자 일란 골든버그는 “전통적으로 미국은 중동에서 소방수 역할을 해왔는데, 지금은 방화범이 되고 말았다"고 AP통신에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동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 핵합의 탈퇴를 선언하면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 가능성도 커졌다. 이미 시리아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은 군사적 공격을 주고받았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후원하는 레바논 헤즈볼라와의 군사적 대결도 마다치 않겠다는 자세다.

 팔레스타인은 더이상 미국을 중재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 측 협상 책임자인 사에브 에렉카트는 “워싱턴은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문제의 한 축이 됐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가장 큰 문젯거리"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정책여론연구센터의 카일 시카키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내 보수파와 복음주의자 등의 압력을 의식해 중동에서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이슈를 건드렸다”고 지적했다.

팔레스타인이 '대재앙의 날'로 정한 15일에도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져 유혈 사태가 우려되고 있다. [EPA=연합뉴스]

팔레스타인이 '대재앙의 날'로 정한 15일에도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져 유혈 사태가 우려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의 영향력이 줄고 있지만 유엔 등 국제기구와 영국ㆍ프랑스ㆍ독일 등 유럽 국가들도 중동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을 ‘국제적인 무정부 상태'로 빠뜨렸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임주리 기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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